이관우한일은행장에게는 요즘 좀 색다른 고민이 하나 있다.

"대출"이란 단어를 어떻게 정의하느냐는 것이다.

은행이 기업이나 개인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행위인 대출.

그러나 이 대출로 인해 어느쪽이 "이익"을 누리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은행들은 그동안 대출을 "기업들에 대한 지원"으로 해석했다.

기업들도 은행에서 대출을 받으면 고마워했다.

그러나 이행장의 생각은 다르다.

"지원을 하려면 무이자로 주든지 해야지 이자를 다 받으며 빌려주는게 무슨
지원"이냐고 말한다.

이젠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는 얘기다.

선진국에서는 금융기관들이 기업들에 자금을 써달라고 구걸하는 실정이다.

국내에서도 벌써 제2금융권에선 "대출세일"이란 말이 나온다.

대출이 더이상 금융기관의 기업에 대한 "지원"이 아닌 셈이다.

따라서 대출의 새로운 정의를 찾는게 이행장의 요즘 고민인 것이다.

금융환경의 변화로 이처럼 금융용어의 "개념"까지 바뀌고 있다.

세계적인 은행들의 합병으로 "공룡은행"들이 탄생하고 있는게 대표적인
사례다.

한마디로 금융계는 격동의 시기를 맞고 있다.

구시대의 가치관이 붕괴되고 새로운 틀이 짜여지고 있다.

그러나 국내 은행들은 이같은 혁명적인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변화의 흐름을 잡지 못하고 우물안의 개구리식 발상만 하고 있다.

"은행문턱이 낮아지고 은행원들의 고압적인 자세도 많이 사라졌어요.
그러나 고객이 원하는 것은 "자금"이지 은행의 "친절"이 아닙니다. 은행은
기업이 필요한 자금을 제때 공급해 주는게 기본입니다. 그런데 이건 아직
멀었어요"(S그룹 자금부장)

"금융기관들이 겉모양만 번지르르해졌지 실제 내용상 달라진 것은 없다"
는게 기업체 자금담당직원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은행들이 자금공급을 제대로 못하는 것은 은행들이 국제금융시장에서
아직 영세기업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한 국내기업들의 자금욕구를 충족시키기에 역부족
이란 설명이다.

국내 은행들은 우선 규모면에서 국제금융시장을 주도하는 선진국은행들에
비해 상당한 열세에 있다.

이는 최근 일본 사쿠라종합연구소가 주요 선진국 대형은행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경영지표 분석에서 잘 나타난다.

사쿠라연구소의 분석대상은 <>사쿠라 스미토모등 일본의 6대은행 <>씨티
BOA등 미국 6대은행 <>바클레이즈 내셔날웨스트민스터등 영국 4대은행
<>도이치 드레스드너등 독일 3대은행 <>SBC 크레디트스위스등 스위스 2대
은행등.

이들 은행과 조흥 상업은행등 우리나라 6대시중은행을 비교하면 국내 6대
은행의 총자산(신탁계정 포함, 평잔기준)은 93년 2백79억달러로 일본(4천9백
9억달러)의 5.7%, 미국(1천4백32억달러)의 19.5%에 불과한 수준이다.

규모의 열세는 수익의 차이로 이어진다.

통상 은행의 수익성을 나타내는 지표로는 총자산이익률(ROA)이 많이 사용
된다.

세전총자산이익률은 미국(1.56%) 스위스(0.97%) 영국(0.74%) 독일(0.67%)
일본(0.11%)등이다.

우리나라의 세전총자산이익률은 0.51%.

일본보다는 다소 높은 편이나 다른 나라에 비해서는 낮은 수준이다.

은행산업의 경쟁력을 평가하는데는 경영규모와 수익성지표외에 생산성도
고려해야 한다.

단위당 영업비용에 대한 영업수익의 비율인 생산성은 스위스(2백2.1%)
일본(1백73.2%) 독일(1백60.2%) 미국(1백57.0%) 영국(1백56.7%)순.

우리나라는 1백9.1%로 스위스은행의 절반수준에 불과했다.

이처럼 경쟁상대인 선진국은행들이 "헤비급"의 몸집을 갖추고 있다면
국내은행들은 "플라이급"수준이다.

금융전문가들은 그래서 국제경쟁력강화를 위해서는 우선 대형화가 시급
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대형화를 통해 업무처리비용을 절감하는 "규모의 경제 (economies of
scale)"와 적은 비용으로 업무다각화를 할수있는 "범위의 경제(economies of
scope)"를 동시에 실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실제 국제금융시장을 주도하는 은행들은 대부분 대형 은행들이다.

은행대형화는 이미 세계적인 추세다.

지난 3월 일본의 도쿄은행과 미쓰비시은행이, 8월에는 미국의 케미컬은행과
체이스 맨해튼은행이 각각 합병을 발표하는등 선진국에선 은행들의 합병
바람이 불고 있다.

세계적인 은행들도 살아남기위해 합병을 택하는 셈이다.

대형화와 함께 부실채권을 정비하는 일도 늦출수 없다.

국내 금융기관들이 안고있는 5조원이 넘는 부실채권은 수익성과 생산성을
떨구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고 있다.

외국은행들과 경쟁하는데도 무거운 짐이 되고 있다.

국내 금융기관들의 부실채권은 은행 2조7천3백28억원, 투금 6천7백36억원,
신용카드 6천66억원, 새마을금고 5천6백49억원등 5조3천억원이 넘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물론 현실적으로 대형화와 부실정비는 쉽지 않다.

전문가들은 "합병불가피론"을 주장하고 있으나 은행들은 아직 "합병불가론"
쪽이다.

자리를 잃을지 모르는 위험한 합병보다는 현실에 안주하겠다는 발상이다.

은행들은 부실채권을 줄이기위한 노력도 별로 하지 않는다는게 일반적인
평가다.

과거에 쌓인 부실채권은 현재의 임원진이 책임질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있을때 별일 없으면 그만"이라는 보신주의가 팽배한 것도 사실이다.

무한 경쟁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선 우선 은행들이 이같은 무사안일과
보신주의를 벗어야 한다.

그래야만 대형화 국제화가 가능하다.

금융기관직원들의 발상의 전환과 이를위한 세대교체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설득력있게 들리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육동인기자>

(한국경제신문 1995년 10월 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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