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영국 베어링스은행 싱가포르 현지법인이 5억파운드의 손실을
입었을 때였다.

시티뱅크.뱅크오브아메리카 등 미국계 은행들은 베어링스와 거래한 탓에
자신들이 입게될 손실을 2시간만에 계산해냈다.

반면 일본의 도쿄(동경)은행은 이 계산에 40시간이나 걸렸다.

이는 일본 은행들의 비효율성을 입증해준 하나의 사례이다.

일본 은행들은 자산규모로는 세계 1위에서 9위까지를 휩쓸고 있지만 자산
운용.리스크관리 등 금융기법에서는 구미 은행들에 한참 뒤져 있다.

9월말에는 다이와은행이 뉴욕지점에서 한 행원의 잘못으로 11억달러의
투자손실을 입은 사실이 밝혀졌다.

문제는 내부감시체제가 허술한 탓에 손실을 입은 사실이 11년간이나
숨겨졌다는 점이다.

부실채권 때문에 상처입은 일본 은행들의 신용은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더욱 실추됐다.

이 사고가 밝혀지기 한달전 미국 신용평가회사 무디스는 일본 은행들에
대해 무더기로 하위등급인 D,E급 판정을 내렸다.

다른 신용평가회사 스탠더드&푸어스(S&P)도 일본 5대은행의 신용등급을
낮출 예정이다.

국제금융시장에서는 최근 일본 은행들에게 돈을 빌려줄때 요구하는 리스크
프리미엄, 이른바 "재팬 프레미엄"이 0.1% 포인트 이상 급등했다.

유러달러 1개월물의 경우 유력한 은행일지라도 리보(런던은행간대출금리)에
0.25%의 "재팬 프리미엄"을 가산한 금리라야만 돈을 빌릴수 있다.

일본 금융계의 부실채권은 공식집계로는 40조엔, 민간 추산으로는 80조엔에
달한다.

문제의 근원은 80년대말 거품경제기에 부동산관련 대출을 무분별하게
늘린데 있다.

90년대초 거품이 꺼지면서 이 대출이 하루아침에 부실채권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대장성은 금융기관들이 언젠가는 부실채권을 처리할수 있다고 판단, 자본
잠식된 상태를 눈감아 주었다.

그러나 사태는 갈수록 악화돼 지난해말 2개의 신용조합이 파산한데 이어
금년 7월말엔 코스모신조가, 8월말엔 최대의 신용조합인 기즈신조가
넘어졌다.

급기야는 "은행은 쓰러지지 않는다"는 일본에서 2차대전후 처음으로
제2지방은행인 효고은행이 파산했다.

신용조합도 문제지만 8조엔 이상의 부실채권에 짓눌려 있는 7개의 주택
금융전문회사(주전)들은 더 골치거리이다.

이들은 90년대초 은행들에 대해 부동산대출 총량규제가 실시된 틈을 타서
농림계 금융기관에서 거액의 자금을 빌려 부동산대출을 왕창 늘려 화를
자초했다.

이들의 부실채권을 대출자인 농림계 금융기관들에 떠넘기면 농협 등이
무더기로 쓰러지게 된다.

그렇다고 대주주인 시중은행 장기신용은행 등에 모조리 떠넘길 수도 없다.

일본정부는 뒤늦게 파산을 전제로 주전 등 허약한 금융기관들을 정리해
나가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필요하면 공공자금도 투입할 예정이다.

그러나 책임소재를 둘러싸고 이해당사자들이 첨예하고 대립하고 있어
문제이다.

부실채권문제가 어떻게 해결되든 일본 금융계의 재편은 불가피해졌다.

우선 농림계 금융기관과 신용조합의 대대적인 통합이 예상되고 있다.

도쿄도는 29개 신용조합을 3개로 통합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으며 농협
중앙회는 2천5백개인 농협을 2000년까지 5백70개로 줄이기로 했다.

그러나 일본 금융계의 통합은 구미 금융기관들의 전략적 제휴와는 다르다.

약자들을 묶는 것에 불과한데다 일본의 고용풍토로는 통합과정에 대대적인
감원을 단행할 수도 없어 경비절감이나 경쟁력강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부실채권문제를 핑계로 일본 금융계가 금융국경이 무너지는 거대한 추세를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일본판 글라스스티걸법"으로 불리는 증권거래법 65조(은행.증권
겸업금지) 폐지를 기대하며 런던 등지에 증권 자회사를 설립, 금융기법을
익히고 있다.

그러나 부실채권에 발목이 묶여있어 투자금융업 진출과 해외시장 공략에
과감하게 나서지 못하고 있다.

미국이나 유럽 은행들이 금융국경이 무너질 미래를 대비하고 있는 지금
일본 금융계는 과거와 싸우는데 힘을 낭비하고 있는 셈이다.

<김광현기자>

(한국경제신문 1995년 10월 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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