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마찬가지예요. 그런 일에는 상관하기 싫어요. 돈 같은 것도 싫고요"

돈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는데 희봉이 돈 운운하는 것을 듣고는 정허가
고개를 잠시 숙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장씨네는 내가 영국부 사람들에게 자기 문제를 부탁할 것으로 믿고
있거든요. 내가 은근히 그런 언질을 주었고 말이죠. 그런데 아무 도움도
못받으면 장씨는 내가 거짓말을 하였거나 영국부가 겉보기와는 달리 별로
권세가 없다고 생각할 거란 말입니다. 나야 뭐 장씨가 어떻게 생각하든
관계없지만, 영국부를 그런 사람들이 업신여기기라도 하면 서운한
일이지요"

정허는 일부러 돈 이야기는 여전히 하지 않고 영국부의 자존심, 그러니까
희봉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을 슬쩍 흘렸다.

아니나 다를까, 희봉의 눈빛이 달라졌다.

희봉은, 진가경이 죽던 날 밤 혼령으로 나타나서, 달이 차면 이지러지게
마련이라는둥 즐거움이 지나치면 슬픔이 찾아든다는둥 가씨 가문의 몰락에
관해 예언을 하던 말들이 기억나고 해서,정허의 말이 가슴에 와 박혔다.

적어도 아직은 영국부가 기울고 있다는 인상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희봉이었다.

"그렇게까지 간절히 부탁을 하는 일이라면 나라도 힘을 써보아야겠네요.
난 마음만 먹으면 무슨 일이든지 해내고 마는 성미거든요"

"희봉 마님의 그 성품 다들 잘 알고 있지요"

정허가 반색을 하며 희봉을 추켜주었다.

"그럼 장씨더러 돈 삼천냥 정도 마련해 보라고 해보세요. 내가 사례금으로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하려면 사람들도 부려야 하고 경비가 좀
들것 같아 하는 말이오"

돈 같은 것은 싫다고 하던 희봉이 드디어 구체적인 돈의 액수까지 이야기
하고 들어왔다.

정허는 이제야 정말 일이 되어간다 싶었다.

청탁을 하는데 있어 이 세상에서 돈만큼 확실한 보장도 없지 않은가.

"그 정도의 돈이야 장씨로서는 아까울 것이 없지요. 어찌해서든지 재판에서
이겨 장안수비 집으로부터 받은 모욕을 씻으려고 벼르고 있으니까"

"다시 말하지만 그 돈은 일을 처리하는 비용으로만 사용하지 내가 개인적
으로는 쓰지 않을 거예요. 돈이라면 나도 지금 당장 삼만냥은 거뜬히 마련
할수 있어요"

정허는 속으로 희봉이 그 돈을 개인적으로 다 차지해도 아무 상관이 없는데
왜 자꾸 그런 말을 하느냐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어느 누가 그 돈이 어떻게 쓰였는가를 따진단 말인가.

"돈은 곧 마련하여 올릴 테니 아무쪼록 판결이 나기 전에 힘을 써주세요"

(한국경제신문 1995년 9월 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