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녀가 나가는 바람에 진종과 보옥은 둘 다 먹이를 놓친 솔개 꼴이
되고 말았다.

둘 사이에 어색한 분위기가 돌고 있는데,하인이 와서 희봉이 두사람을
부른다고 전갈하였다.

둘이 희봉에게로 가보니 희봉은 벌써 말끔하게 세수를 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는 방바닥에 다리를 뻗고 쉬고 있었다.

화장을 지운 그런 모습의 희봉도 다른 때 못지않게 아름다워 보였다.

시녀들이 집에서부터 준비해온 음식과 차들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왔다.

희봉의 일행이 그것으로 요기를 하고 좀 더 쉰후에 수레에 다시
올랐다.

농가의 아낙네들이 우르르 달려나와 전송을 할때 집사 내왕이 집주인
에게 답례의표시로 선물을 주었다.

집주인과 아낙네들이 감사하다고 연신 허리를 굽혀 절을 하였다.

보옥은 아까 그 처녀가 어디에 있나 둘러보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수레가 마을 어구를 지날 무렵 그 처녀가 막내동생인 듯한 어린아이를
안고 다른 계집아이들과 함께 웃고 떠들며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수레가 다가오자 그 처녀와 계집아이들이 길을 비켜주며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 처녀가 진종이 말을 타고 수레를 따라오는 것을 보고는
얼굴을 붉히며 얼른 고개를 돌려버렸다.

진종도 지은 죄가 있어 그 쳐녀를 못본척 하였다.

그 광경을 본 보옥은 마음이 아팠다.

당장에라도 수레에서 내려 그 처녀에게 달려가 진종 대신 사과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진종의 손길을 은근히 즐기던 처녀의 모습이 떠오르자 그럴
생각도 슬그머니 없어졌다.

다만 그 처녀의 모습이 작아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보옥은 자꾸만
뒤돌아보았다.

"수레를 좀 더 빨리 몰라니까"

희봉이 장례 행렬을 따라잡기 위해 마부를 재촉하였다.

수레바퀴가 힘차게 구르고 수레를 따르는 말들이 말굽소리도 요란하게
달려나갔다.

보옥은 수레가 흔들리는 바람에 엉덩이가 아플 지경이었다.

좀 쉬었다 가면 심신이 상쾌해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 처녀로 인하여
마음이 번잡스러워진 보옥이었다.

그동안 진가경 장례 기간이라 절제해 왔던 방사를 마음껏 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고 만 것이었다.

진가경의 영구가 안치되는 철함사에는 여승들도 있다는데 혹시 어떤
기회가 생길지도 몰랐다.

그 처녀 때문에 몸이 달아오른 진종도 아마 철함사 여승들에 대한
기대로 가슴이 부풀어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여승을 잘못 건드렸다가는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르므로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었다.

희봉은 멍청히 앞만 보고 있는 보옥이 무슨 생각을 하나 하고 그
표정을 살폈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9월 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