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봉의 말을 들으니 보옥은 문득 대옥이 보고싶어졌다.

지금쯤 아버지장례는 다 치렀는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슬픔을 어떻게
감당하고 있는지. 약간 병색으로 인하여 창백하고 곧잘 새초롬한 표정을
짓던 대옥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대옥이 영국부를 떠나가 없는 동안에 설보채가 얼굴이 훤해져서 보옥에게
미소를 보내며 이전보다 상냥하게 굴었는데, 보옥이 그런 보채가 싫지는
않았지만 보채가 그럴수록 대옥이 더욱 그리워지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보채는 지금 장례 행렬 어디쯤에 끼여 따라오고 있을 것이었다.

이렇게 희봉과 이 이야기 저 이야기 나누며 편하게 수레를 타고 가고
있었지만, 보옥은 장례 행렬에서 빠져나와 잠시라도 쉬어가고 싶은 마음이
자꾸만 들었다.

진종과 함께 슬쩍 빠져나가 놀다 오면 좋을 텐데.

보옥이 진종이 어디에 있나 둘러보았으나 워낙 명정과 수레와 가마들이
많은지라 잘 보이지 않았다.

이때 반갑게도 두명의 집사가 말을 타고 달려오더니 희봉에게 잠시
쉬었다 가시라면서 휴식장소까지 마련했다고 하지 않는가.

"형수님, 그렇게 해요.

철함사까지 가려면 아직도 한참 남았는데 요기라도 좀 하고 쉬었다 가요,
네?"

보옥이 조르자 희봉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 두 집사에게 형부인과 왕부인의
의견은 어떤지 알아보고 오라고 하였다.

두 사람이 형부인과 왕부인이 있는데로 갔다가 돌아와 희봉에게 아뢰었다.

"두 마님들께서는 그냥 쉬지 않고 계속 나아가시겠답니다.

저희들에게는 봉저(희봉의 별명)마님을 모시고 쉬고 오든지 마음대로
하라고 그러셨습니다"

"어머님과 큰어머님이 허락을 하셨으니 우리 그렇게 해요"

보옥이 다시 한번 조르자 희봉이 마음을 정하고,

"그럼 우리가 쉴 장소로안내해다오"

집사들에게 말했다.

수레의 말을 몰던 마부들이 희봉의 수레를 행렬에서 빼내어 반대방향으로
나아갔다.

보옥이 타고왔던 말은 안장만 얹은채 수레를 따라 터덜터덜 끌려가고
있었다.

보옥는 진종과 함게 노는 것이 좋겠다 싶어 하인아이에게 진종을
불러오도록 지시하였다.

진종은 말을 타고 부친의 가마 뒤를 따르다가 하인아이의 전갈을 받고는
자기도 말머리를 돌려 희봉의 수레를 뒤쫓아갔다.

"바로 여기 이 집입니다" 집사들이 안내해 간 장소는 초가지붕을 이고
있는 어느 조촐한 농가였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9월 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