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 8층 이경식신임한국은행총재방에 들어서면 "일신우일신"이라고
쓰여진 액자가 걸려있다.

지난달 24일 취임 즉시 바꿔놓았다.

이총재의 좌우명이다.

이총재는 "하루하루를 반성하고 새롭게 시작한다"는 뜻에서 자리를
옮길때마다 사무실에 걸어놓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부산지점 지폐유출사건으로 거듭나기에 바쁜 요즘 한국은행의
위상과 관련, 이 문구가 유난히 눈길을 끈다.

지난 93년 8월 새정부의 최대개혁으로 평가받는 금융실명제 발표당시의
사진을 탁자위에 놓고 있는 이총재를 본지 박영균경제부차장(금융팀장)이
만나 한은의 개혁구상등을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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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총수에서 2년만에 중앙은행총재로 옮기셨습니다. 주위에선 관운이
좋은 분이라 합니다. 그래선지 건강도 훨씬 더 좋아보입니다. 한은에는
34년만에 돌아왔는데 달라진 점은 뭡니까.

<>이총재=한은이 뭔지도 모를 신입행원때 떠났고 또 아직 돌아온지도
며칠 되지않습니다. 옛날과 지금을 단순 비교하기는 무리지요. 다만
그동안 경제사회여건이 엄청나게 변했는데 중앙은행이 그만큼 변하지는
못한것 아니냐는 생각입니다.

한은이 그동안 자기혁신노력을 꾸준히 해온 것은 사실이지만 주변 여건의
변화를 따라잡지는 못한 것같습니다.


-한은의 위상이 과거에 비해 많이 약화됐다는 지적이 있는데요. 특히
조사기능이 약화됐다는 말이 많습니다.

<>그건 당연한 말입니다.

50년대초에는 우리나라에 경제조사기관이라고는 한은조사부밖에 없었지요.
그러나 이젠 상황이 달라진 것 아닙니까.

KDI(한국개발연구원)등 국책연구기관은 물론 상당한 두뇌를 갖춘
민간연구소들이 우후죽순 들어서면서 경제조사의 영역이 세분화 전문화되고
있으니 당연히 그런 말들이 나오지요.

물론 그렇다고 한은의 통화신용정책기능이 약화된 것은 아닙니다. 과거
보다 훨씬 세련되게 잘하고 있지요.

결국 한은의 위상이 일부 강화되고 일부 쳐졌다는게 정확한 표현일
겁니다.


-"한은맨"은 보수적이고 스마트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본인이
이런 이미지와 맞는다고 생각하는지요.

<>스스로 평가하려니 어렵네요.

한은뿐아니라 관청과 업계에서도 일을 했으니 "한은의 피가 섞인
관료실업가"라고나 하면 될까요. (웃음)


-요즘 한은은 창립이후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는 것같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이런 중요한 시점에 한은총재에 임명한 이유를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무엇을 기대한 걸까요.

<>글쎄요. 임명권자의 속마음을 알수없으니까요. 그러나 "인간 이경식"을
종합적으로 평가를 했겠지 어느 한쪽 기능만을 중시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만 시점이 시점이라 내부개혁을 강조하신거라고 생각합니다.



-주위에선 이총재가 개혁의 적임자라서 임명됐다고 보는것 같습니다.
금융실명제의 주역이니까요. 지금은 또 한은개혁이 필요한때 아닙니까.
그래서 한은에서도 긴장하는 분위기인데요.

<>한은 직원수가 3천6백명인데 외국의 중앙은행들과 비교해보면 그렇게
많은 수는 아닙니다. 나라인구와 비례해서도 그렇고요.

그러나 얼핏봐도 중복기능이 눈에 띄이고 사람이 필요이상으로 많은 곳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곳은 줄여야 겠지요.

물론 2천년대의 국민경제를 뒷바침할수 있는 조직이 필요할 경우 새조직을
만들고 인력도 보충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금융실명제는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조기실시를 주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은개혁은 언제쯤 할 계획인지요.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습니다. 성공한 사례를 극히 찾아보기 힘들
정도지요.

혁명은 강제로 입을 다물게 하면 되지만 개혁을 일일이 설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개혁은 환경변화에 맞춰 빠른 시일내에 해야 합니다. 환경적응에
실패한 공룡이 지구상에서 사라진 이유를 되새겨야 하지요.

한은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웅성웅성댈때 개혁을 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냉정한 입장에서 필요한 것을 해야지요.


-개혁의 골자는 어떤 것들입니까.

<>우선 한은의 생산성을 높이는게 중요합니다. 지금 세계적으로
화이트칼라(사무직)의 생산성을 높이는게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습니다.

일반 제조업은 과거 수십년간의 경영학적 연구로 생산성향상을 위한 많은
아이디어와 연구결과가 나와있으나 화이트칼라에 대한 연구는 이제 시작
입니다.


-정부조직개편에서 보듯 위로부터의 강제적인 통폐합이나 기구폐지등은
상당한 후유증이 따르게 마련인데요.

<>후유증을 최소화하는 방법으로 개혁을 해야지요. 그러기위해 한은
내부뿐아니라 밖에서도 가급적 의견수렴을 많이 할 계획입니다.


-개혁도 중요하지만 위축된 한은직원들의 사기진작도 급한 일일텐데요.
실추된 공신력도 회복해야 하고요.

<>우선 한은직원들이 뼈저리게 반성하고 철저하게 책임지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이와 동시에 내부에서 그야말로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물론 이번 사고로 심적 타격을 받은 직원들의 사기앙양을 위한 방안도
마련할 생각입니다. 그것은 물론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인사정책이
기본이 되겠지요.


-부산지점의 지폐유출사고의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설마."하는 생각이 화를 불렀다고 봅니다.

중앙은행에서 사고가 났다고 하면 흔히 금고사고나 현송사고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쪽은 철저하게 대비하지요.

그런데 기계로 하는 일에서 사고가 터지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현금을 보면 "도심"이 생기기마련인데..


-사고후에도 한은에서 수습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발권은행인 중앙은행에서 55만원이 유출됐다는 것은 시중은행의
금전사고과는 차원이 다른 얘깁니다.

단돈 1만원이 유출됐어도 엄하게 조사했어야 했지요.

금액은 문제가 안됩니다.

이번에 사건이 언론에서 터졌을때도 한은이 신속하게 처리하지 못했다는
생각입니다.


-경제총수인 부총리와 한은총재를 모두 지냈는데 제3자에게 권한다면
어느자리를 권하겠습니까.

<>가능하면 두자리 다 해보라고 하겠습니다.


-올 봄에는 한은독립문제가 금융계의 최대이슈였습니다. 정부가 한은법
개정안을 내놓고 여야가 한은독립을 전향적으로 검토하기도 했지요.

이총재께서는 지난 89년 금융통화운영위원회(금통위) 위원으로 있을때
"한은법 개정보다는 관행정착이 더 중요하다"고 하셨지요.

<>어느나라도 중앙은행과 정부의 사이는 좋지않습니다. 또 좋아서도
안되고요.

모든 일을 의욕적으로 하려는 정부와 보수적인 중앙은행의 사이가 좋으면
정책이 한쪽으로 치우치지요. 따라서 정책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의견충돌은
있게 마련입니다. 이런 것들을 법률로서는 해결할수 없습니다.

일본의 경우 중앙은행법개정을 제출했다가 30년이상 사장되어 있는등
법적으로는 중앙은행의 위상이 우리보다 훨씬 약합니다. 그러나 중립성은
보장되어 있습니다. 중앙은행의 중립성은 법과는 관계없다는 얘깁니다.

따라서 우리도 관행으로 중앙은행의 중립성이 보장되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의 한은의 중앙은행 "독립"주장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것 같습니다.

<>"독립"이란 단어는 부적절한 표현입니다. "중립"이라는 말이 맞습니다.

중앙은행 중립의 본질은 통화신용정책을 수립할때 "정치력압력으로부터
중립"을 지말합니다. 그러나 국민경제의 균형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중앙은행의 통화신용정책만으론 곤란합니다.

정부의 재정정책과 산업정책등으로 모두 엉켜 조화를 이뤄야만 합니다.

이를위해서도 통화신용정책은 다른 정책들과 조화를 이뤄야 합니다. 정부
와의 조화를 그때그때 법으로 해결할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법개정에는 분명히 반대한다는 말씀이네요.

<>물론 이런 내용을 담은 이상적인 법률이 마련되면 반대못하겠지요.
그러나 그런 법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지금의 법체계를 유지하면서
관행으로 중앙은행중립을 정착시키는게중요합니다.


-은행감독원을 분리, 금융감독원으로 만든다는 정부안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아직 구체적으로 검토해보지 않았으나 한은의 중립성을 지키는 일과는
별개의 마이너한 문제아닙니까.


-결국 한은총재의 경제팀 내에서의 역할이 중요한 것 아닙니까. 새정부
들어선 특히 한은총재가 정책결정과정에서 소외됐다는 지적도 많습니다.

<>그렇지 않을 겁니다. 제가 부총리로 재직할때는 한은관련사항은 당시
김명호총재와 꼭협의를 했습니다.

-93년 1월, 그러니까 이총재께서 부총리 취임하기 직전부터 상승세를
탓던 경기가 이제 정점에 온 것 같습니다. 요즘 경기를 어떻게 보십니까.

내년이후엔 경기가 하강하고 물가는 불안해 스태그플레이션이 우려된다는
얘기가 정부내에서도 나오고 있습니다.

<>올해 성장률이 9%가 넘는 것이 잠재성장능력에 비해서는 높은
편입니다만 결코 "이상"현상은 아닙니다.

내년도에 시설투자가 거의 마무리될 것으로 보이지만 그래도 경기를
멈추게 할 정도는 아니지요. 건설경기나 소비경기는 지속될 것이고요.
그래서 내년에도 8%대의 성장은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 성장률이 잠재성장율 밑으로 떨어지지않으면서 경제의 소프트랜딩
(연착륙)이 가능할 것으로 봅니다. 그런 방향으로 통화신용정책을 운용할
생각이고요.

-금융계는 개방화 자유화등으로 앞으로 그야말로 격변을 겪을 모양입니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가입을 앞두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고요.

특히 최근 미국 일본에서는 금융기관의 합병 대형화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국내에서도 은행합병이 가시화될 것이라는 얘기가 나돌고
있습니다만.

<>은행합병에 관한 정부의 의도를 아직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은행들이 스스로 살아남기위해서 대형화를 위해 합병을 시도할
가능성은 있다고 봅니다.

물론 살아남기위한 방법이 꼭 "대형화"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은행합병은 현실적으로 쉽지않아요. 특히 사람의 문제가 보통
어려운게 아닙니다. 대등합병의 경우 이런 문제를 해소할수도 있겠지만
말처럼 쉽겠습니까.


-그렇다고 정부에서 인위적으로 합병을 유도할수는 없는것 아닙니까.

<>비유가 적절치는 않지만 정부가 은행에 대해 가지고 있는 마음은
부모가 자식걱정 하는 마음과 비슷할 겁니다. 잘해도 걱정 못해도 걱정인
것은 인지상정이지요.

그래서 정부에서 쉽게 손을 놓지못하는것 같고.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금융기관들도 이제 생성하고 소멸할수 있는 "하나의 기업"이란 생각을
가져야 한다는 겁니다. 정부의 금융기관에 대한 인식도 그렇게 변해야
하고요.


-끝으로 한은 직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을 해주시요.

<>중앙은행직원이라는 긍지를 갖고 그야말로 "열심히" 일해 달라는
부탁입니다. 그래야만 중앙은행의 중립성을 확보할수도 있습니다. 열심히
일하지 않고는 중립성을 보장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지요.

직원들이 열심히 일해 국민의 신뢰를 받을때 중립성 회복도 가능할 겁니다.

<정리=육동인기자>

(한국경제신문 1995년 9월 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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