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봉도 장례식 때 길가에 노제를 위해 제단을 차린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저렇게 큰 천막까지 세워놓고 그 안에 제단을 차린 것은
처음 보았다.

"저런 식으로 노제를 차린 것은 제붕이라 하느니라" 왕부인이 설명을
해주면서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었다.

그 제붕들은 보통 사람들이 세운 것이 아니라 적어도 왕의 칭호를 가진
고관들이 진설한 것이었다.

맨 처음 것은 동평군왕의 제붕요,둘째 것은 남안군왕, 셋째 것은
서녕군왕, 넷째 것은 북정군왕의 제붕이었다.

그 네 명의 군왕들 가운데서 북정군왕만은 세습적으로 자손들에게
이어져 왕작인 셈이었다.

그것은 옛날 북정왕이 나라를 위해 누구보다 뛰어난 공로를 세웠기
때문이었다.

지금의 북정군왕인 수용은 스무살이 채 되지 않았지만,타고난 용모가
수려하고 성품이 겸손하고 온화하였다.

마침 북정왕 수용이 자기가 세워놓은 제붕을 둘러보고 진가경의
장례에 참석하기 위해 수행원들을 거느리고 징을 울리며 행차하였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관원들이 다른 일반인들의 접근을 막으며 북정왕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북정왕은 아침 다섯시에 입궐하여 조례를 마친 후에 소복으로
갈아입고는 양산이 펼쳐진 큰 가마를 타고 달려온 것이었다.

며칠 전에도 친히 진가경의 영전에 와서 조문을 하였는데, 이렇게
장례식에까지 참석을 하니 가씨 가문으로서는 큰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북정왕의 제붕 앞이 북적거리고 있을때, 진가경의 장례 행렬이
거대한 산이 대지를 밟으며 움직이는 것처럼 장엄하게 북쪽으로부터
다가왔다.

북정왕의 행차를 목도하게 된 가진은 장례 행렬을 잠시 멈추게 하고
가사, 가정 들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 국례에 따라 북정왕을 정중하게
영접하였다.

북정왕 수용도 가마 안에서 허리를 굽혀 답례를 하며 미소를 머금었다.

북정왕의 가문과 가씨 가문은 조상때부터 친밀한 교분을 나누어왔으므로,
수용은 가진들을 대할때 왕작을 지닌 고관티를 내지 않았다.

가진이 재삼재사 북정왕 수용에게 감사의 말을 올리고, 수용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데 왜 그러느냐면서 감사의 말을 사양하였다.

그러더니 수용이 가진을 따라온 가정에게 목소리를 낮추어 넌지시
물었다.

"그런데 구슬을 물고 태어났다는 자제분이 있다고 하던데 누구지요?
늘 한번 만나보기를 원했는데 오늘 여기에 나와 있겠지요?"

"여기 있고 말고요. 곧 불러다 뵙도록 하지요"

가정이 부리나케 물러나 보옥을 데리러 갔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8월 2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