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0년간 수많은 기업들이 명멸했다.

맨손으로 시작해 10년안에 국내 굴지의 그룹이 되기도 했고 상당수는 하루
아침에 사라졌다.

창업보다는 수성이 어렵다는것을 여실히 반영했다.

광복이후 기업 변천사는 치열한 전장이었다.

< 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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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후 일본기업들이 철수하자 국내경제는 물자부족에 허덕이게 됐다.

먹을것과 입을 것이 한결같이 모자랐다.

일본인들이 남기고간 공장들이 있었으나 제대로 가동되지 않았다.

이 여건에서 기업들이 해야할 일은 물자부족을 메우는것이 급선무였다.

특히 생필품을 만들면 날개 돋친듯 팔렸다.

이를 틈타 급부상한 기업은 제당 제분 방직등 이른바 "3백"산업을 맡은
회사들.

3백기업이 부상한 45년부터 60년까지 자유당시절을 보통 기업사에서
제1기로 본다.

이 시기에 삼성(이병철) 동양(이양구) 삼양사(김연수)등은 제당으로,
삼호방직(정재호)은 방직으로 거금을 모았다.

자유당정부는 당시 일본인들이 남기고간 귀속재산(일명 적산)을 연고권있는
사람들에게 헐값에 불하했다.

적산회사에 근무한 것을 연고권으로 활용한 사람들은 적산을 불하받으면서
급부상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소화기린맥주(두산그룹) 조선유지(한화그룹) 선경직물(선경그룹)등의
창업주인 박두병 김종희 최종건씨등이 연고권을 활용, 발판을 마련했다.

김지태씨도 귀속재산을 모아 견직업체로 성장했다.

이로인해 재계에 한때 "적산을 잡아라"는 유행어가 생겨나기도 했다.

군사정권이 등장한 60년대부터는 10년을 획으로 기업들의 부침이 심했다.

제2기로 꼽히는 60년부터 69년까지는 정부의 경제개발5개년계획등 개발
정책에 힘입어 기업그룹의 판도가 요동을 쳤다.

정부개발정책과 맞아떨어진 기업은 떠올랐고 그렇지 못한 기업은 밀려났다.

대한제분(제분및 중석) 개풍(제빙) 동양(제당 시멘트) 한국유리(판유리)등
거대기업들이 일시 뒤졌다.

반면 한진(운수 항공) 신진(자동차) 현대(건설 자동차) 쌍용(시멘트)
한국화약(화약 정유) 대농(섬유 양곡수입)등이 혜성처럼 나타났다.

이어 기업그룹구조를 수출기업으로 변신시킨 그룹은 성장했고 그렇지 못한
기업은 주저앉았다.

수출산업의 육성은 섬유기업그룹의 화려한 등장을 가져왔다.

경제개발초기단계엔 섬유 목재 신발류등 경공업분야가 수출에 앞장섰다.

전방(김용주) 경방(김용완) 일신방직(김영) 동일방직(서정익) 선경직물
(최종건) 코오롱(이원만) 동양나이론(조홍제) 한일합섬(김한수)등이 섬유
그룹으로 발돋움했다.

동명목재(강석진) 대성목재(전택요) 성창기업(정태성) 한국합판(고판남)등
은 목재합판으로 팽창했다.

현대건설이 66년 1월 월남 캄란만 준설공사를 맡은 것과 대림산업이
리치만항만공사를 수주한 것이 첫 해외수주로 그뒤 중동으로 진출하는
기폭제가 된다.

66년 1월부터 시작된 것이 본격적인 정부의 중화학공업육성시책.

이때부터 중화학으로 변신하지 못한 기업은 뒤지거나 없어진다.

제3기인 70년대에는 그룹간의 우열이 뚜렷이 가려지기 시작한다.

70년대초 1차오일쇼크는 모든 국민을 긴장속으로 몰아 넣는다.

이 홍역이 시작되자 정부는 자금지원을 중화학공업에 더욱 집중한다.

포항제철이 기초산업을 맡게 된다.

이어 강력한 수출드라이브는 현대 삼성 반도상사등 종합상사의 부상을
부채질한다.

65년 자본금 5백만원으로 한성실업을 설립, 섬유수출대열에 낀 대우는
창업10년만에 30개계열사를 거느리는 신화를 낳는다.

이런 신화를 흉내내던 제세 율산 원그룹등은 뒤안길로 사라지기도 한다.

오일쇼크의 극복을 위해 정부와 기업이 고안해낸 히트작은 중동진출이다.

70년대 초반부터 중동건설특수를 안게 된다.

뜨거운 사막에서 땀흘려 건설한 대가로 받은 달러로 현대그룹은 79년
삼성을 제치고 대기업순위 1위를 차지하면서 현대특유의 강인한 이미지를
확립했다.

제4기에 해당하는 5공화국(80년)이후 현재까지는 중공업진출러시에 이어
현대 삼성 LG 대우등 그룹들이 반도체 신소재 정밀화학 항공우주 정보통신
분야에 엄청난 투자를 시작했다.

해방이후 짧은 기간이지만 거대기업으로 올라섰던 회사들조차 흔적없이
사라지는 경우가 많았다.

시대적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퇴조를 맞기도 했고 정부정책기조에 역행하다
철퇴를 맞기도 했다.

맨손으로 갑부의 대열에 올라 "금광왕"의 자리를 차지했던 최창학씨의
대창광업을 시작으로 삼호그룹 동명목재 한국철강(신영술) 삼학산업(김상두)
화신그룹(박흥식) 신진자동차(김창원) 천우사(전택요) 제동산업(심상준)
조선공사(남궁연) 대한중기(김연규)등 많은 기업들이 기업주의 명패를
바꾸거나 사라졌다.

명성그룹(김철호)을 비롯 광명그룹(이수왕)등도 화려하게 재계를
수놓았으나 하루아침에 가라앉았다.

지난 86년 5월부터 정부의 5차례에 걸친 부실기업정리조치로 11개그룹
70개기업이 창업주의 손을 떠나 새주인을 맞았다.

이 조치로 대표적 희생양이 된 그룹이 국제그룹이다.

지난 50년간 과연 어떤 기업이 흥하고 어떤 기업이 망했는가.

그동안 기업부침의 열쇠는 역시 얼마나 혁신을 거듭했느냐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제일제당의 이병철, 금성방직의 김성곤, 낙희화학의 구인회씨등은 이
사업을 모체로 끊임없는 혁신과 다각화를 거듭해 모두 그룹랭킹 10위안에서
계속 경쟁을 벌이고 있음이 이를 반영한다.

뼈를 깎는 변신과 이노베이션을 통한 경쟁력 강화없이는 기업으로 살아
남을수 없다는 것이 바로 지난 반세기 기업사의 교훈이다.

오는 21세기 세계속의 기업으로 성장하려면 미리부터 준비를 해야만 한다.

선진국시장에서 어깨를 겨뤄야 한다.

연구개발투자에 인색한 기업은 미래에는 아무런 보장을 받을 수 없다.

광복 50년을 기점으로 미래의 인재를 스스로 키우는 기업이 돼야 한다.

< 이치구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8월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