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부인은 희봉에게 다시 한번 당부를 하고 일어날 채비를 하였다.

그러면서 희봉에게 물었다.

"오늘은 어떡할 참인가?

지금 나랑 같이 영국부로 돌아갈 텐가, 녕국부에 남아 있을 텐가?"

"제 걱정은 마시고 돌아가시도록 하세요.

저는 여기 좀 더 있다가 돌아갈게요.

할 일이 좀 있어서요"

"할 일이라니?"

"아주버님 가사를 책임맡은 자로서 우선 무엇보다 집안의 질서부터
잡아야겠어요"

왕부인은 희봉이 기특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형부인과 함께
영국부로 돌아갔다.

혼자 남게 된 희봉은 세칸짜리 포하청으로 건너와 집안의 질서를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곰곰이 생각하였다.

무엇보다 먼저 집안의 고질적인 병폐를 고쳐야 하는데, 그 병폐들을
하나씩 짚어보았다.

첫째, 집안에 사람이 많다보니 물건들을 잊어버리기 일쑤다.

둘째, 평소에 개개인의 직책 구분이 확실하지가 않기 때문에 일이 생기면
서로 책임을 미루기 쉽다.

셋째, 매사에 돈을 물쓰듯 쓰다 보니 청구하고 지불하는 절차가 규모가
없이 주먹구구식이다.

넷째, 무슨 일이 중하고 가벼운지,힘들고 쉬운지 구별이 없어 아무나
되는 대로 일을 맡는다.

다섯째, 하인들을 방종하게 버려두다 보니 윗놈들은 점점 뻔뻔스러워지고
아랫놈들은 아무리 잘 해도 승진하기가 힘들다.

이렇게 희봉이 녕국부의 고질적인 병폐를 다섯가지로 꼽고 하나 하나
어떻게 고쳐나갈까 궁리해 보았다.

한편 그 시각에 녕국부 총집사격인 도총관 내승은 집안 일을 희봉이 맡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동료들을 불러 모아 앞으로의 사태 추이에 대해
이야기들을 주고 받았다.

내승이 동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제부터 너희들은 매사에 각별히 조심을 해야 할 거야.

영국부 가련 대감댁 마님은 우리 마님 같지 않으시단 말이야.

성미가 불 같고 칼 같애.

잘못 걸려들었다가는 국물도 없을 거야.

그러니 그 마님이 집안 일을 맡고 있는 한달동안 만이라도 모두들
날마다 아침 일찍 일어나고 저녁 늦게까지 일할 각오를 하란 말이야.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 마님이 부르거나 하면 지체말고 달려오고, 물건을
내오라 하면 실수없이 잘 하란 말이야.

좀 고되긴 하겠지만 꾹 참아야지 별수 있나.

하여튼 망신들 당하지 않도록 정신 바짝 차리라구.

그 마님이 다시 영국부로 돌아가고 나면 그때 가서 숨을 좀 돌리든지
하지 뭐"

내승이 긴장된 얼굴로 입을 악다물었다.

다른 동료들도 비장한 기색이 역력하였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8월 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