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진은 희봉이 집안 일을 맡는 동안 녕국부에서 기거하기를 은근히
바랐으나, 희봉이 정색을 하고 사양하는 바람에 더 이상 권할 수가 없었다.

가진으로서도 그 편이 다행스런 일인지도 몰랐다.

지금은 며느리 진가경의 죽음을 슬퍼하는 나머지 욕정같은 것은 몸속
어디로 숨었는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지만, 열흘이 지나고 보름이 지나고
하다보면 그 욕정이 느닷없이 되살아나 온몸을 사로잡을 수도 있었다.

그때 희봉이 곁에서 기거하고 있으면 밤중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을
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가진과 보옥은 부인들과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물러갔다.

친척집 부인들도 하나 둘 돌아가고 왕부인과 희봉만이 남았다.

왕부인이 친정 조카인 희봉을 염려하는 뜻에서 몇가지 당부의 말을 더
하였다.

"네 아주버님 말이다.

그 사람 조심해야 한다는 거 잘 알고 있지?

진씨가 저리 빨리 죽은 이유도 그 사람의 방탕한 색욕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지.

지금은 슬픔에 젖어 초췌한 얼굴을 하고 지팡이까지 짚고 다니지만, 언제
무슨 약초를 먹고 힘을 내어 덤빌지 모른단 말이야.

그러니 늘 경계를 늦추지 말고 이상한 기미가 보이면 즉각 따돌리란
말이야"

희봉의 얼굴이 슬그머니 붉어졌다.

"그 점은 염려놓으세요.

제가 아주버님 집안 일을 맡는 것은 진가경의 장례를 치를 때까지만
이잖아요?

아무리 음탕한 사람이라도 며느리 장례기간중에 딴 마음을 품을 수는
없겠죠.

아까 집을 한 채 따로 내어주겠다고 한 것도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제가 고생을 할까싶어 그랬던 거죠"

"물론 지금은 그런 마음으로 했겠지만 사람 일이란 알 수 없는 법,
밤낮으로 늘 가까이서 대하다 보면 없던 마음도 생기는 법이지.

사람의 욕정이란 장례기간이라 해서 잠잠히 있는 것은 아니지.

욕정은 해일과도 같아서 사람의 체면이고 염치고 다 덮어버리는 거지"

왕부인은 만개된 꽃처럼 피어나는 희봉의 자태를 훑어보며 그 아름다움에
새삼 감탄하는 한편 그 아름다움으로 인해 염려가 되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네, 알겠어요.

늘 조심할게요.

녕국부에서 일이 끝나자 마자 영국부로 속히 돌아오도록 하고, 아주버님과
단 둘이 있게 되는 상황은 될 수 있는한 피하도록 할게요"

희봉이 영리한 눈을 반짝이며 왕부인을 안심시키려고 애썼다.

"난 희봉이 모든걸 잘 해내리라 믿지만,가진이 워낙 음험한 사람이라서
말이야"

(한국경제신문 1995년 8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