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으로 들어서는 가진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지팡이를 짚은 몸이 비틀대고 있지 않은가.

가진이 떨리는 무릎을 가까스로 굽혀 여러 부인들에게 인사를 하자
형부인이 염려스런 얼굴로 말했다.

"몸이 많이 수척해졌군. 매일같이 그렇게 무리하게 일을 하니 몸이
상할 수밖에. 그런데 무슨 일이 있기에 좀 쉬지도 않고 여기까지
왔는가?"

그러면서 형부인은 보옥에게 가진을 부축해주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할멈 시녀들을 재촉하여 의자를 빨리 가져오게 하였다.

가진은 의자에 앉지 않고 엉거주춤 선 채로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이렇게 온 것은 두분 숙모님과 제수씨에게 의논할 일이 있어서
그럽니다"

"무슨 일로 그러는가?"

"아시는 바와 같이 며느리가 저리 일찍 죽고 안사람까지 병들어 누워
있으니 집안 일이 엉망이군요.

그래서 제수씨에게 한달 동안만 우리 집안 일을 돌보아줄 수 없겠는가
하고 부탁을 드리러 온 것입니다.

그래만 준다면 한결 마음이 놓이겠습니다"

가진이 부인들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용건을 꺼냈다.

"난 또 무슨 일이라구? 그 일이라면 희봉이 동서네와 함께 지내니
동서에게 물어보게나"

형부인이 슬쩍 왕부인에게로 그 일을 떠넘겼다.

왕부인이 얼른 끼여들어 대꾸하였다.

"희봉은 아직 그런 일을 하기에는 어려요.

그 큰 살림을 맡았다가 만일 실수라도 하는 날에는 사람들의 웃음
거리가 될 뿐이에요.

다른 사람을 찾아보는게 나을 거예요"

왕부인이 반대하는 이유는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가진이 며느리 진가경을 건드렸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왕부인인지라 가진이 희봉을 또 넘보지 않을까 염려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하긴 가진이 지금은 진가경의 죽음으로 너무나 상심한 나머니 기력조차
잃고 지팡이까지 짚고 다니는 신세라 감히 희봉을 농락할 생각은 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늙은이들도 지푸라기 잡을 힘만 있으면 그 짓을 하려고 덤벼
든다고 하지 않는가.

하물며 지팡이 잡을 힘은 남아 있는 가진이 아닌가.

게다가 희봉의 미모에 가서가 반하여 상사병에 걸려 죽은지도 얼마
되지 않는 판에 가진인들 희봉의 미모에 반하지 않을리 있겠는가.

또 희봉의 남편 가련이 먼길을 떠나고 없으니 희봉도 욕정을 못이겨
딴 마음을 품을 수도 있었다.

이래저래 왕부인은 희봉을 가진의 집안 살림을 맡을 사람으로 보내는
것이 꺼려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눈치를 챘는지 가진이 멋쩍게 웃으며 왕부인에게로 한걸음 더
다가갔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8월 1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