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진은 이제 진가경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회방원 대문근처를 5품관
부인의 장례격식에 따라 꾸며나갔다.

우선 큰길 쪽으로 향한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그 양옆으로 고악청을
만들어 검푸른 옷을 입은 악사들이 두 패로 나뉘어 번갈아 주악을
울리게 하였다.

그리고 짝을 지어 마주 세워놓은 장례용 기구들은 칼로 베고 도끼로
자른듯 정연하기 이를데 없었다.

대문 앞에는 붉은 바탕에 금박으로 글씨를 쓴 커다란 관명패가 두개
세워져 있었는데, 거기에는 가용의 관명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방호 내정자금도 어전시위 용금위"

궁중에서 자금도 수호의 위임을 받은 어전시위 용금위라는 관명이었다.

관명패 맞은편에는 중과 도사들이 재를 올리는 높다란 단이 세워져
있고 거기 기도의 내용을 담은 방문(방문)들이 큼직큼직하게 씌어
있었다.

이만큼 차려놓으니 가진의 마음이 비로소 흡족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내인 우씨가 병으로 자리에 누워 있어 집안 일을 맡아볼수
없으므로 지체 높은 부인들이 조문을 올때 그들을 잘못 대접하여 실례를
범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하였다.

우씨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 집안 일을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은 없을까.

이런 가진의 고민을 눈치챈 보옥이 넌지시 가진에게 희봉을 추천하였다.

"희봉이라면 가련의 아내가 아닌가. 나에게 제수씨뻘이 되는데 과연
일을 잘 해낼 수 있을까?"

"제가 지켜본 바로는 틀림없습니다.

영국부의 크고 작은 일들도 얼마나 깔끔히 잘 처리하는지 주위
어른들로부터 칭찬을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수씨가 자기 집안 일도 많을텐데 우리 집안 일을 맡아볼 수
있을까?"

"지금 가련은 대옥의 아버지가 편찮으시다 하여 대옥을 데리고 양주로
떠나고 없습니다.

그래서 집안 일이 조금 줄어들기도 했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을
겁니다.

한번 의견을 물어보시지요"

"그래볼까? 지금 어디에 있을까?"

가진과 보옥은 부인들이 모여 있는 방으로 가보았다.

마침 그 날은 재를 올리지 않는 날이라 손님들도 별로 없고 몇몇
가까운 친척집 부인들만 찾아와서 형부인, 왕부인, 희봉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부인들은 좀 흐트러진 자세로 이 이야기 저 이야기 하고 있는
중에 가진 대감이 왔다는 말을 듣고는 자리를 정리하려고 하다가
가진이 불쑥 들어서는 바람에, "에그머니나" 하며 허둥지둥 안쪽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희봉만은 천천히 일어나 가진을 정중하게 맞았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8월 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