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토 고이주에타(63)미 코카콜라 회장겸 최고경영자(CEO)의 가슴에는
말못할 아픔이 각인돼 있다.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쿠바인으로 선망받고있지만 고향 하바나에 남겨놓은
추억은 36년이 지나도 지울수 없는 응어리로 남아있다.

지난 56년 피델 카스트로가 쿠바를 장악하기 전까지만해도 청년
고이주에타의 앞날은 창창했었다.

외동아들인 그는 1900년대초 스페인에서 이주해온할아버지가 가업으로
일으킨 사탕수수가공업의 상속자로 남부러울게 없었다.

가족들의 기대속에 미국유학길에 올라 예일대학을 졸업한 그는 미국의 한
화학제품회사에서 사회생활에 첫발을 내디뎠다.

아버지와의 약속대로 매주 토요일마다 하바나에 들러 가업을 돌봤다.

22살때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하바나에 돌아와 코카콜라에 입사한 그는
6년만에 쿠바내 5개 코카콜라 생산공장의 수석기술담당이사 자리에 오르는
등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카스트로가 등장하면서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카스트로는 코카콜라 원료의 국내구입을 강요하는등 외국인기업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기업활동에 대한 카스트로의 간섭은 그런대로 견딜수 있었다.

그러나 일상생활까지 규제당하는 것은 참을수 없었다.

"막내인 셋째 아이를 낳을 때였어요. 내차가 있는데도 진통이 시작된
아내를 옮길수 없었습니다. 모든 개인교통수단이 불법화됐기 때문이지요.
마음을 졸이며 앰뷸런스가 오기를 기다릴 밖에요"

60년 8월 그는 미마이애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재산은 물론 하바나에서의 추억까지 모두 뒤로할수 밖에 없었다.

그가 지닌 것은 아버지에게 빌려 매입한 8,000달러상당의 코카콜라주식
100주가 전부였다.

한달앞서 도미한 아이들과 합류한 그는 당분간 미국에 체류하기로 결심
했다.

쿠바의 코카콜라공장은 이미 카스트로정부에 접수된 터였다.

"모든게 변했어요. 유모를 포함, 6식구가 비좁은 방 한칸에서 살아야할
정도로 마이애미생활은 비참했지요. 그러나 미국생활이 오래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어요. 카스트로가 아직까지 권좌에 있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미국생활 초창기 한가지 변하지 않은게 있다면 그가 코카콜라에 몸을 담고
있었다는 것과 일에 대한 열정이었다.

그의 능력을 인정, 마이애미 공항호텔에 사무실과 한명의 비서를 내준
코카콜라를 위해 그는 밤낮없이 뛰었다.

쿠바사람이란 불리함을 극복하기 위해 인간관계에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1년뒤 낫소시로 옮겨 카리브해 연안지역의 코카콜라 판매를 총괄지휘했으며
64년부터 애틀랜타 본사근무를 시작했다.

35살되던해인 66년 그는 최연소 기술개발담당부사장에 발탁됐다.

그로부터 15년뒤인 81년3월 회장겸 CEO에 취임했다.

코카콜라에 발을 들여논지 22년만에 최정상에 오른 것이다.

"지난 69년 미국시민권을 획득했을 때 나를 받아준 사회를 위해 나의 모든
생을 바치겠다고 다짐했고 그후 나의 생활은 그 다짐에 충실했다고 자부
합니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책임과 의무를 다할 때만이 자기것으로
승화시킬수 있다고 그는 강조한다.

< 김재일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7월 31일자).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