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문이 백년 가까이 권세를 떨치고 있지만 언제 그런 속담들
처럼 되어버릴지 알 수 없단 말입니다.

나무가 넘어지면 원숭이들이 뿔뿔이 흩어진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
가문이 기울면 찾아오는 손님들도 없게 될 것이고 우리 가문의 사람들도
하나 둘 떠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름만 남은 빛좋은 개살구같은 가문이 되고 말 것이
아닙니까"

진가경의 말에 희봉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였다.

"듣고 보니 옳은 말이에요. 근데 그런 염려 안해도 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진가경이 쓸쓸히 웃으며 대꾸하였다.

"아주머니도 참.자고로 흥망성쇠의 운세는 돌고 돌게 마련인데 사람의
힘으로야 어떻게 막을 수 있겠어요?

다만 오늘날같이 흥해 있는 동안에 망하는 경우를 대비하여 미리 손을
써두면 그런대로 이 가문은 유지될 수도 있을 거예요.

그런데 지금 우리 가문을 보면 겉으로는 일들이 잘 돌아가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내가 볼 때는 두가지 일이 잘 되지 못하고 있어요.

이 두가지만 잘 해놓으면 훗날에 가서 가문이 어려워질 때 적지않은
도움을 줄 거예요"

"그 두가지 일이 무엇인데요?

그걸 잘 이루는 것이 소원이라는 말이군요"

"그래요. 그 두가지 일을 잘 처리해달라고 부탁하러 온 거예요.

지금은 철을 따라 조상님들께 제사를 드리고 있지만 정해놓은 제사비용
같은 것은 없단 말이에요.

그리고 가문의 아이들을 위해 학숙을 세워놓았지만 유지비도 정해져
있지 않단 말입니다.

이런 일들이 그냥 주먹구구식으로 처리되고 있지요.

아직은 가문이 넉넉하여 제사비용이니 학숙유지비 문제때문에 염려할
필요는 없지만 장차 가문살림이 어려워지면 이런 비용들이 어디서
나오겠어요?

조상님들께 제사드리는 일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고 자손들을 잘 가르쳐
입신양명하게 하는 일, 이 두가지 일보다 더 중요한게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지금의 부귀영화에만 빠져서 뒷일을 대비하지 않으면 그때
가서는 조상에게도 제사를 드리지 못하게 되고 자손들을 가르치지도
못하는 형편이 될 거란 말이에요"

진가경이 평소에 소원으로 품고 있었다는 두가지 일에 대해 들으니
희봉은 새삼 그녀의 혜안에 감복할 지경이었다.

사실 그 두가지 일만 제대로 이어지면 가문은 어떤 일을 당해도 계속
유지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럼 어떻게 그 두가지 비용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겠어요? 묘안이
있으면 알려줘요.

내가 온힘을 다해서 처리해보겠어요"

(한국경제신문 1995년 7월 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