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34년만에 지방자치시대가 시작되었다.

우리 손으로 직접 뽑은 단체장을 중심으로 우리 지역의 살림을 우리 스스로
해결해 나간다는게 지방자치의 골자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많은 국민들은 아직 얼떨떨한게 사실이다.

지방자치단체의 책임과 권한은 어디까지며 중앙정부의 몫은 또 어디까지
인지 명확히 이해하는 국민이 과연 얼마나 될까.

다만 삼풍백화점 붕괴현장을 둘러보는 서울시장의 심각한 표정에서 "이제
시민의 안위에 관계된 어떤 일이 일어나면 꼼짝없이 시장의 몫이구나"하는
"자치"의 분위기를 느끼게 된다.

민선 시장의 책무중 으뜸은 무엇보다도 시민의 생활을 편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빅3의 한판 승부가 초미의 관심사였던 서울시장 선거만 봐도 공약의
초점은 시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데 모아졌었다.

저마다 교통지옥의 해결을 장담했으며 임기중 맑은 수돗물을 공급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부실공사를 막고 안전진단을 철저히 하여 다시는 무너지고 폭발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공약했다.

심지어 또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시장직을 걸겠다는 비장한 결심을
내보인 후보도 있었다.

다 좋은 말이요, 훌륭한 공약이다.

그런데 한가지 의아한 것은 교통문제에서부터 탁아소 설치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제시된 공약중에서 시민의 생명과 직결되는 먹거리를 어떻게 하겠다
는 공약은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뭐니뭐니 해도 먹거리는 살림살이의 으뜸 가치요, 기본이다.

지역살림도 예외가 아니다.

일본의 고베 지진때에 평소 선진국민이라고 자부하던 그들도 다급하게
찾은 것은 고급 가전제품이나 첨단 컴퓨터가 아니었다.

라면과 주먹밥이 우선이었던 것이다.

안전한 먹거리를 적정한 가격에 안정적으로 공급해야 하는 것은 이제 민선
자치단체장의 주요 임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약에서 소홀히 취급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시민에 대한 농산물 공급은 중앙정부가 해왔기 때문이다.

농산물 공급에 문제가 생기면 농림수산당국에 불호령이 떨어졌고 농산물
가격이 치솟으면 물가당국에 비상이 걸렸다.

시민에게 농산물을 공급하는 도매시장도 중앙정부가 물가관리 차원에서
당연히 지어주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심지어 농협을 국영 기업으로 잘못 알고 도시민을 위한 농산물 유통이
마치 농협의 책임인 것으로 인식되기까지 했다.

농협은 농민의 자조단체이다.

농협이 농민의 소득증대를 위해서 도시에 농산물 판매거점을 확보해야할
이유는 있지만 도시민을 위해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조직은 아닌 것이다.

이제 민선 시장은 시민에게 질 좋은 먹거리를 싼 가격으로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 머리를 써야할 시기가 왔다.

서울의 가락동 농수산물시장 관리책임자를 서울시장이 임명한다는 것은
농산물 유통에 대한 시장의 역할이 어떤 것인가를 일깨워주는 것이다.

지방자치시대를 맞아 민선시장의 농산물 유통행정은 분명 달라져야 한다.

해야할 일이 많겠지만 무엇보다도 도매시장의 시설확충과 기능정상화가
급선무다.

전국민의 4분의1이 살고 있는 서울에 공영 도매시장이 가락시장 한군데
뿐이라는 사실은 농산물 유통문제가 사각지대로 남아있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나마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가.

개장된지 10년이 지났음에도 농약 안전성 검사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음은
물론 위탁거래와 기록상장이 아직도 성행하고 있는 실정이다.

불공정거래가 횡행하는 시장의 대세속에서 공정거래를 지킬수 밖에 없는
농협은 오히려 뒷전으로 밀려날수 밖에 없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그레셤의 법칙은 여기에도 적용된다.

같은 시기에 개설한 대만의 대북도매시장은 공정거래의 기틀을 잡아 농약
안전성 검사에서부터 수급조절까지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음을 타산지석
으로 삼아야할 것이다.

이제 민선시장은 사회간접자본확충이라는 차원에서 더 많은 도매시장을
건설함과 아울러 농협을 비롯한 공익우선의 정직한 참여자들이 농산물 유통
에 주도적 역할을 다할수 있도록 충분한 공간을 마련해 주어야할 것이다.

그것이 먹거리 수급의 안정을 기해 시민의 건강과 생활의 안정을 기하는
방편이 된다.

민선 시장으로서 해결해야 할 일이 한두가지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먹거리에 대한 투자를 제일 우선으로 해야 한다고
고집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선거공약에서 먹거리가 밀려났다는 것은 그 인식자체를 크게 우려
하지 않을수 없게 한다.

교통이든 환경이든 간에 일단은 먹거리 문제가 해결된 바탕위에 고려할
사안이다.

따라서 어려운 여건을 감안하더라도 공영도매시장 물류센터와 같은 선진형
유통시설은 물론 농민시장을 비롯한 소매 유통시설확충등 농산물 유통에
예산지원의 우선 순위를 두어야 하며 예산이 부족하면 국가의 보조를
얻어내서라도 이에 대한 과감한 투자를 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농산물 유통은 농민을 유권자로 삼고 있는 민선 도지사들만의 과제가
아니다.

농민이 없는 도시의 민선 시장들도 같은 비중으로 농산물 유통을 다루지
않으면 안된다.

먹는 문제야말로 시민의 안위를 지키는 자치단체장으로서 제1의 책무이기
때문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7월 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