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프로그램이 좋은 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밑그림이 좋아야 한다.

큰 밑그림이 튼튼하고 유연하면 웬만한 환경변화가 생겨도 부분적인
보완만으로도 전체적인 흐름은 깨지지 않는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물론이다.

프로그램이 추구하는 작업의 목표가 명료해야하고 논리가 완벽해야 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사람들이 밑그림 그리기에 오랜시간을 보내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21세기를 내다본 우리나라 금융산업을 위한 밑그림 그리기는 사실상
오래전부터 시작됐다.

한국개발연구원을 위시해 수많은 연구소 기관, 그리고 개인들이 달려들어
본격적인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80년중반이다.

근 10년이 지났지만 이들중 그 어느 밑그림도 적격판정을 받은 것은 없다.

적격판정이 아직 내려지지 않고 미완으로 남아 있는 이유는 모든 면에서
완벽하고 특히 불편부당성과 투명성에 하자가 없는 대안이 나와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적지않다.

그러나 우리 세대 최고으리 작품이라고 평가될수 잇는 큰 밑그림이 제대로
그려지지 않는 이유는 그림을 제대로 그릴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도 아니요,
접근방법이 개발되어 있지 않은 때문도 아니다.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모든 이해당사자들이 큰 그림은 제쳐놓고 자기 몫을
키우려는 이기심만 키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금융산업개편이라는 명제는 큰 틀이 추구해야할 목표, 환경변화에
적응할수 있는 전략적 준비와 그 방법론, 현재 이용가능한 수단에 대한
점검등 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도외시된 채 금융산업개편의 모든 과제가
부문간 혹은 회사들간의 영역싸움으로 치환돼 왔다.

큰 틀의 테두리내에서 보면 증권도, 투자금융도, 종합금융도, 투신도 모두
모두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증권은 증권대로, 투자금융은 투자금융대로, 종합금융은
종합금융대로 자기몫 챙기기에 매진해 왔다.

금융기관들 치고 자기의 입장을 대변해줄 협회를 가지고 있지 않은 데가
없고 이들의 장치고 재무부출신이 아닌 곳이 없다.

학자들은 학자들대로 임차포(Hired Gun)를 자임, 이쪽 세미나에서는 이쪽에
유리한 발언을 해주고 저쪽에서는 저쪽에 유리한 입장을 취해 주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선물분야를 놓고 이해당사자들이 벌이는 보이지 않는 싸움은 희극 그 자체
라고 할 정도다.

재경원이 생기기 전, 경제기획원과 재무부 그리고 증권거래소는 선물을
상품선물과, 금융선물 그리고 주가지수선물로 나눠 상품선물은 경제기획원이
금융선물은 재무부가 그리고 주가지수선물은 증권거래소가 제각기 나누어
가져야 한다고 싸워 왔다.

그러다 재무부와 경제기획원이 재경원으로 합쳐지자 상품선물과 금융선물을
분리하자는 주장은 온데 간데 없어져 버렸다.

경제기획원과 재무부가 한몸이 됐으니 싸울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렇다고 주가지수선물까지 싸움의 대상에서 제외된 것은 아니다.

앞으로 제정될 선물법에 주가지수선물을 포함시키느냐 마느냐를 놓고
재경원내 이해당사자들간에 반목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입법 담당자의 독선적 권위주의의 산물로 여겨지고 있는 투자자문사들은
아직도 무엇을 해야할지 모른 채 방황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종합금융회사직원들은 정부가 보장해 준 안락한 틈새시장에서 생기는
짭짤한 이익을 바탕으로 연 1,200%씩의 보너스를 챙겨가면서도 시아버지
환갑에 축의금 100만원을 더 줘야 한다는 요구사항을 내놓고 있는 실정이다.

큰 밑그림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돼 있지 않은 채 증권산업개편안,
투자금융-종합금융개편, 선물시장에 대한 입법조치등이 곧 구체화 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밑그림 없는 금융산업개편은 한낱 부분적 땜질에 불과하다.

오늘을 위한 땜질은 미래의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사회적 경비를 유발할 수 있다.

팽두이열은 "돼지의 귀를 삶으려면 머리부터 삶으라"는 뜻이다.

증권산업을 개편하고 종합금융,투자금융,투자자문,리스업을 개편하는 일은
투명하고 논리적이며 오래갈 밑그림에 대한 국민적 선택이 있고 나서부터야
가능한 일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7월 1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