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들의 국내 주식투자가 본격적으로 이뤄진지 3년반이 지나는 동안
국제영업부 직원들은 수도 없이 울어야 했다.

약정유치가 뜻대로 되지않아 울적한 적도 있었고 때로는 너무나 기뻐서
울기도 했다.

더러는 "떡"하나 더먹으려고 떼쓰며 눈물지었다.

외국인 고객을 만나 간과 쓸개를 다빼준다는 말을 들어도 이들은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그게 "프로"아니냐"고 반문한다.

대우증권의 국제영업부를 이끌고 있는 구자삼이사.

지난92년1월 우리증시가 개방될 무렵 그는 런던현지법인 사장으로 있었다.

93년3월 국제영업부장으로 오기 전까지 약2년간이다.

과연 런던투자자들이 한국투자에 나설 것인지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긴가민가하고 있던 그에게 한통의 전화가 날아들었다.

시장개방을 불과 1주일 앞둔 91년12월22일.영국의 세계적인 투자세력인
K펀드에서 "어느 종목을 사면 좋으냐"며 투자의사를 밝혀온 것이다.

투자규모는 2천만달러였지만 당시 그에겐 "큰돈"임에 분명했다.

평소 친분이 있는 펀드매니저였지만 당시는 대세하락의 막바지국면이어서
좀처럼 본전을 웃돌지 않아 적잖이 속도 끓여야 했다.

주문을 낸 펀드매니저가 출장이나 휴가라도 가면 그가 가는 곳마다
일일이 전화로 알려주는 것은 물론 투자원본이 반토막나 "거래끝"이라는
사형선고도 받아야 했다.

92년말엔 하룻사이 8천만달러에 달하는 증권주 매수주문을 받아내
시장에선 "핫머니유입"이라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지금은 삼성전자 한종목에 2억달러의 주문을 받는 그여서 당시일을
떠올리면 피식 웃고 말지만 그동안의 "놀란 가슴"은 이루 말할수 없단다.

그런가 하면 행운의 사나이도 있다.

쌍용투자증권의 박정삼이사. 영업년도말인 93년3월31일 약5백억원에
달하는 대량의 외국인자전거래를 성사시켰다.

하루전만 해도 연간 국제약정으로는 1위였던 대우증권보다 1백억원이상
뒤져 있던 쌍용투자증권이 막판뒤집기에 성공하며 축제분위기에 젖었던
대우측을 초상집으로 만든 실무주역이기도 했다.

그 자전거래는 조지 소로스로 유명한 컨텀펀드의 절세를 위한 것으로
박이사(당시 국제영업부장)와 김석동부사장(당시 상무)만이 아는 "2인조
특별공작"이었다.

김부사장과 절친한 퀀텀측의 펀드매니저가 "한국과 2중과세방지협정을
맺지않은 네덜란드에서 말레이시아로 투자국적을 옮겨달라"는 요청을
해왔고 이들 2인조는 부하직원들도 모르게 임무를 완수해낸 것이다.

퀀텀측의 자전거래는 똑같은 규모로 같은해 5월8일에도 재발하면서
일단락됐다.

기획실로 옮긴 박이사는 "이제 국제영업도 중개업무라는 출혈경쟁에서
탈피해 국제인수쪽으로 눈을 돌려야 할때"라고 밝힌다.

외국의 펀드매니저가 한국을 방문하면 이들 국제통들은 그야말로
프로정신을 발휘한다.

외국기관의 회장이나 사장은 물론 유명한 펀드매니저에 대한 대접은
각별하다 못해 극진하다.

쌍용투자증권이 헬기까지 대령해 용평스키장등으로 직행하거나 대우증권이
캐딜락으로 모시는 일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들은 이제 손님에 따라 다양한 취향을 파악해놓고 있다.

영국이나 미국계 펀드매니저들은 호텔등에서 깔끔한 저녁식사를 마치고는
휴식을 취하는 편이며 홍콩계는 먼저 방석집을 자청할 정도란다.

거물급 손님일수록 점잖은 것은 물론이지만. 외국 펀드매니저들의 방한
목적인 기업방문을 주선하는 것이나 워커힐쇼와 용인민속촌관광을 시키는
일도 이들 국제통들의 빼놓을수 없는 몫이다.

외국인들이 묵고있는 호텔로 꽃이나 과일바구니 초코렛등을 보내는
작은 정성도 잊지않는다.

<손희식기자>

(한국경제신문 1995년 7월 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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