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프로젝트의 경우 기술 도입을 주선하고 공장 검토를 마치는데만 보통
석달은 걸린다.

견적을 작성하여 제출하고 최종 가격 협상에 들어가 합의에 이르기까지는
또 몇달씩 밀고 당기는 싸움을 겪어내야 한다.

단독격적의 경우에 사업주는 특혜의 시혜자로서 온갖 굴욕을 강요한다.

복수 입찰의 경우는 경쟁을 최대로 이용하는 오너의 술수에 말려들어
경쟁자들은 피말리는 싸움을 감당해야 한다.

이렇게 반년에서 길게는 일년 가까운 준비기간과 협상을 끝내고 마침내
수주에 성공하면 게약 조인식을 가지게 된다.

사장은 합의된 가격과 계약조건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수주성공에 의의를
두고 가벼운 마음으로 자카르타로 날아간다.

그런데 조인식장에서 뜻하지 않게 오너의 대표가 가격과 계약조건의 변경을
요구하는 것이다.

일본이나 서구의 관행에 젖어온 신임사장은 이 뜻하지 않은 무레에 당황
한다.

겉으로는 애써 미소를 짓지만 속으로는 화가 치밀어 오른다.

몇번의 다른 프로젝트를 거치고 나서야 사장은 이것이 이 지역의 관행임을
알게 된다.

싸인을 하려고 온 최종결재자와 마지막 담판을 벌여 손해볼 일은 절대로
없다는 계산에 예의와 염치가 끼어들 틈이 없는 것이다.

오후 2시로 예정된 조인식이 새벽 두시에야 거행된 경우가 있다.

비행장에서 곧 바로 달려온 미국 라이센서의 대표들은 우리 직원들이
야밤중에 뛰어다니며 구해 온 햄버거로 겨우 연명한다.

그래도 이 정도면 해피엔딩에 속한다.

어느 최고급 주점에 관계 회사들의 대표들을 모두 초대해 놓고 성대한
조인식을 준비한뒤 세시간이나 기다리다가 결국 무산되어 찬밥을 돌 씹듯
먹고 헤어진 경험이 있다.

조인 직전에 라이센스의 조건변경을 요구하는 사업주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았던 것이다.

라이센서의 대표는 유럽 본사의 법제부와 몇시간 동안 눈물나는 협상(?)을
벌였지만 실패하고 만 것이다.

이 프로젝트는 우여곡절 끝에 두달후 영국에서 삼자 조인식을 가졌고 지금
순조롭게 건설공사를 진행중에 있다.

문화가 다르고 풍습이 다르면 자칫 커다란 오해가 생길수 있고 이로
말미암아 불신과 반목의 씨가 배태될수 있다.

그러나 관행이 다르다고 무조건 이를 배척할수 만은 없는 노릇이다.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고 슬기롭게 이에 대처하는 노력만이 있을 뿐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6월 2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