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님들이 계시는 자리에서 제가 주제넘게."

희봉은 극 목록을 훑어보면서도 선뜻 고르지 못하였다.

"우리는 벌써 몇 착 골라서 노래도 듣고 구경도 했어요. 그러니 사양
말고 두어 착 골라서 우리도 듣도록 하세요"

형부인과 왕부인의 권유에 희봉이 다시 극 목록을 뒤져 보며 "환혼기"
한 착과 "탄사"한 착을 골랐다.

"어머,환혼기를 골랐네.환혼기는 명나라 탕현조가 지은 "모란정"
제35장을 각색한 거잖아요. 유몽매와 두여랑의 연애담이 정말
애절하지요"

형부인이 이전에 "환혼기"를 본 적이 있는지 아는 체를 하였다.

"탄사는 흥승이 지은 "장생전" 제38장을 각색한 거잖아요.

장생전은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 이야기인데 탄사는 주로 안록산의
난으로 양귀비가 물에 빠져 죽는 이야기죠. 그런데 무겁고 슬프기 쉬운
이야기를 재담으로 재미있게 풀어가는 것이 탄사죠"

이번에는 왕부인이 질세라 아는 체를 하였다.

"지금 공연하고 있는 저"쌍관고"가 끝난 뒤에 환혼기 한 착과 탄사
한 착을 하면 시간도 알맞겠네요"

희봉이 해가 어디 쯤에 왔는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뜰에서는 풍림여의 첩 벽련이 수절을 하며 아들을 기르는 "쌍관고"장면이
배우들의 노래와 연기로 펼쳐지고 있었다.

대감들은 악사들을 데리고 응휘헌으로 가서 술자리를 벌이는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 가서도 지금 그 술자리에 어울려 있을 것이었다.

가서는 술이 오르면 오를수록 희봉 생각이 더 날지도 몰랐다.

희봉은 가서를 곯려줄 일을 떠올리니 저절로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

희봉은 그 후에도 자주 진씨를 찾아와 병문안을 하였다.

동짓날이 다가오자 사람들은 진씨가 한 해를 넘길 수 있을지 염려들을
하였다.

한 해만 넘기면 살아날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하고 희망을 가져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루는 희봉과 우씨가 진씨 걱정을 하면서 "충일충"비법을 쓰기로
하였다. 충일충은 궂은 일로 궂은 일을 때우는 일종의 액막이였다.

가령 사람이 죽게 되었을 때 아예 관이나 수의를 준비해버리면 그
사람이 다시 회복되어 살아나는 수가 있는 법이었다.

그러면 장례준비도 되고 액막이도 되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수의나 다른 장례물품을 구하는 것은 별 문제가 없는데 좋은
나무 얻기가 어려워 진씨 관을 짜는 일이 문제였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6월 2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