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관계에 변화의 조짐이 엿보이고 있다.

북미간의 경수로협상 타결에 이어 쌀지원 문제도 최근 남북간에
합의를 봤다.

이로 인해 남북간 교류.협력이 본격화될 것이라는 기대가 부풀어오르고
있다.

지난 92년 남한쌀 5천t이 북한에 직교역방식으로 들어갔을 당시
통일부총리를 지낸 최영철씨(60)를 만나봤다.

마침 올해는 광복 50주년인데다 6.25 발발 45년이 되는 날이라 화제는
자연스레 남북관계와 통일문제로 이어졌다.

*** 약 력 ***

<> 35년 목포생 <> 58년 서울대정치과졸
<> 한국일보 기자/동아일보정치부장
<> 9,10,11,12대 의원(국회보사위원장 국회부의장>
<> 88년 체신부장관 <> 89년 노동부장관
<> 90년 대통령정치특보 <> 92년 부총리겸 통일원장관
<> 현 통일번영연구원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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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홍은동 연구원(통일번영연구원)에 나가 책도 읽고 이곳저곳에서
강연도 하면서 소일하고 있습니다.

-최근 북경 쌀회담에서 남한은 1차로 15만t의 쌀을 북한에 무상으로
제공키로 했습니다. 이번 회담 결과를 어떻게 평가하고 계십니까.

"우리가 15만t의 쌀을 무상으로 지원키로 한건 무척 잘한 일입니다.
남북관계가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측이 "조건없는 무상"원칙을 내건
것이 주효했다고 봅니다. 원산지 표기가 안됐더라도 북한주민들은 결국
알게됩니다.

부총리로 있을 때 우리쌀 5천t이 천지무역을 통해 북한에 들어간
일이 있습니다. 그때 북한당국은 주민들이 이 사실을 알게될 것이
두려워 선박을 접안도 안시키고 바다 한가운데서 가져갔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하역한지 20일도 못돼 청진에 도착한
남한쌀 소식이 개성까지 퍼졌더랍니다. 이처럼 북한에도 이른바
"유비통신"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북한은 이쌀의 댓가로 주기로한 시멘트와 석탄을 끝내 보내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김달현씨가 왔을때 제가 물어봤습니다. 왜 안주느냐고.
그랬더니 "있으면 왜 안주겠습니까. 탄을 파려면 전기가 필요한데 전기가
없습니다"라고 하더군요.

이때도 북한이 처음부터 "무상"을 받아들였으면 쌀제공은 더 큰
규모로 더 빨리 이뤄졌을 겁니다. 어쨌든 국적선에 태극기를 달고
북한에 쌀을 들여보내게 된 것은 매우 잘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남북관계는 어떻게 보십니까.

교류가 급진전될 것이라는 낙관론이 벌써부터 대두되고 있습니다만.
"장기적으로는 진척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단기적으로는 북한의
신경질적인 열등 컴플렉스가 완전히 가시지 않아 불투명합니다.

북한은 상당기간 버텨내기위해 애를 쓸것이고 체제를 무리하게 유지하려다
보면 무리수를 두게되는 경우가 많을 겁니다.

경수로와 쌀을 받기로 했지만 체제 불안요소가 아직도 남아있다는 얘기죠.
당분간 가시적인 화해는 나타나지 않을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김정일의 주석직및 당총비서직 승계가 정식으로 매듭지어지면
그후 어떤 형태로든 변화가 있을것으로 생각됩니다.

남북한은 지난 92년 8차례에 걸친 고위급회담을 가질 당시만해도 관계
급진전을 이룰 기회가 있었습니다.

당시 남측 국방장관과 북측 인민무력부장관과의 핫라인을 가설하기위해
통신기술자들이 작업까지 하고 있었죠.그러나 "남한노동당사건(김낙중사건)
"이 터지면서 남북관계는 급냉돼 버렸습니다. 물론 그에앞서 한미안보회의
와 팀스피리트 재개문제로 다소의 논란은 있었지만요. 생각해보면 참으로
아쉽습니다."

-북한은 최근 "한국따돌리기"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경수로
회담 과정에서도 그렇고 끈질긴 정전협정의 평화협정 전환공세도 그렇고요.
한국배제를 통해 북한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북한의 "한국배제"는 기본적으로 남북한 격차가 큰데서 오는 컴플렉스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측에도 반성할 점은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동족간 공존을 주장하고있고 미국 일본등 외국의 대북접근도
말로는 찬성하고있습니다. 그러나 국내 일각의 보수적 시각으로 인해
그때그때마다 대북정책이 혼선을 빚는 경우가 있습니다.

국내에 견제 세력이 있을경우 북한은 우리의 진심을 좀처럼 믿지않으려
합니다.

예를들어 북측 김달현부총리가 방한했을때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대우그룹의 남포공단 계획이 꼭 이뤄졌으면 좋겠습니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때 대통령은 "염려마십시오.반드시 이뤄지도록 하겠습니다"라며
우리부총리에게 직접 지시까지 했습니다. 그 얘기를 들은 김달현
부총리는 북한에 돌아가 이 얘기를 전달했을겁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해준것이 없습니다.

남측 부총리가 답방을 하기로 돼있었는데 국내의 강경보수세력이
목소리를 드높였지요. 북한을 도와주는건 그들을 강하게 하는것이고
결과적으로 통일을 늦추는 행위라고. 여기에 대선까지 겹쳐 여당
지지세력을 의식하지 않을수 없게됐죠.결국 그 계획은 추진되지
못했습니다.

이 경우처럼 남한의 대통령이 보장하는 것도 안되는 것을 본 북한은
"한국은 자체적인 결정권이 없고 미국의 뜻에따라 움직이는것 아니냐"는
생각을 했을겁니다. 그래서 미국과 직접 상대해야겠다는 결심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김정일은 아직도 주석직 인계를 하지않고 있습니다. 언제쯤 권력승계가
이뤄질 것이라고 보십니까.

"곧 될 겁니다. 보이지 않는 반대세력이 있긴 하지만 북한의 사회체제로
볼때 조직화되긴 힘듭니다. 김정일의 권력승계에는 이미 내부적으로는
끝난 상태지요. 형식적인 절차만 남은 셈입니다. 신격화 상태를 유지하면서
승계하려니까 시간이 걸릴 뿐이지요. 또 김일성의 분신이라는 점을 강조
하기위해 탈상때까진 취임을 미루는 겸양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북한은 앞으로 어쩔수 없이 개방을 할수 밖에 없다는 주장이 서방의
학자들을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습니다. 과연 북한이 중국정도나마
제한적인 개방정책을 취할수 있을까요.

"북한의 개방은 의외로 빨라질 것 같습니다. 지금 북한은 북한내 미국
연락사무소의 개설을 서두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경우 평양에서
성조기가 펄럭이게 됩니다.

지금껏 북한주민에게 미국은 타도의 대상이었는데 이로 인해 사상적
혼미상태가 일어날 겁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개방적인 사고가 자리를
잡아가게 될 것입니다.

최근 북한을 다녀온 주한외교관을 만났더니 "지금 북한의 중간지도자들은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고 하더군요.

이들 중간지도계층은 예전엔 주변4강중 러.중.일.미 순으로 신뢰를
했는 데 지금은 미.일.중.러 순으로 바뀌었다는 얘깁니다.

이같은 조류는 자연의 이치와도 같습니다. 굳게 닫혀왔던 북한도 개방을
피할수 없습니다. 따라서 남한으로선 한사람이라도 많은 사람이 북한을
오가도록 하는 게 중요합니다.

물자나 플랜트도 기회만 있으면 공짜라도 주는 게 좋습니다. 교류의 폭이
넓어질수록 개방의 속도와 체제의 붕괴속도가 빨라질 겁니다"

-경수로문제와 쌀문제가 잘풀리면서 남북경협도 크게 늘어날 것이라는
기대감이 기업들을 중심으로 일고있는데요.

"경협 또한 전망이 밝다고 봅니다. 이번 쌀회담에서 남북은 7월중
2차회담을 갖기로 했는데 이를 계기로 남북대화가 계속될 경우 경협
물꼬가 터질 겁니다.

한가지 주의할 것은 당국간 협의가 없다고 해서 경협이 안되는 건
아니라는 점입니다. 기업차원의 경협을 정부가 무조건 제지할 필요는
없다는 거지요. 정부와 기업간에 선후를 가리지 말고 교류를 터야합니다.
사실 기업은 장사꾼인데 이들이 오죽 잘 알아서 하겠습니까.

우리기업은 지금 세계적 수준에 와 있습니다. 경협도 이젠 획기적으로
민간에게 맡기는 쪽으로 전환해야될 시점이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정부
몰래 추진하거나 사전상의 없이 과당경쟁 양상을 띠는 건 바람직 하지
않지요"

-그래서 말씀인데요,대북경제협력 정책을 총괄하고있는 통일원이 너무
규제지향적이 아니냐는 지적이 있습니다. 경제부처들의 경우 "규제완화"
바람이 일고있는데 통일원은 아직도 규제일변도의 관료주의를 타파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깁니다. 통일원 공무원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좀 해주시지요.

"그렇게 보지는 않습니다. 의외로 통일원 공무원들은 개방적이고
비관료적입니다. 과장직 이상만해도 일반직보다 별정직이 많습니다.
그만큼 사고방식이 비관료적일 수 있는 것이지요. 진취적이기도 하고요.
다만 부처 이기주의는 경계해야지요.

개별부처의 문제보다는 부처간 할거주의의 폐해가 더 심각합니다.
대북교류에 관여하는 통일원과 재정경제원,통상산업부등이 지혜롭게
조율을 해나가야할 겁니다"

-지금 일부에선 통일을 그리 서두를 필요 없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동서독의 경우와 같이 혼란만 불러일으키고 한국의 부담이
너무 커진다는 것입니다. 통일의 시기와 방법에 대해서는 어떤 견해를
갖고 계십니까.

"매우 위험한 발상입니다. 통일이 단기적으로는 우리에게 커다란
부담이 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통일이 빨라질수록 통일비용이 줄어듭니다.

통일비용의 규모만해도 개념정립이 안돼있어 수조에서 수백조까지
얘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어느 계산방법을 보더라도 "보이지 않는
가치"계산은 안해놨더군요. 이를 반드시 더해야합니다.

우선 3천만 북한주민이 질곡에서 벗어나 맛보게 될 "자유의 값"이
과연 얼마이겠습니까. 이는 돈으로는 계산할수 없는 것이지요.

통일이 좀 늦어도 된다는 식의 생각이 자리잡게된 것은 "통일의
당위성과 필요성"에 관한 충실한 교육이 없었기대문입니다. 정부에
몸담았던 사람으로서 책임을 느낍니다"

-통일한국의 정치체제에 관해선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십니까.

지금 일각에선 내각제를 주장하고 있는데요.

"그 문제는 어디까지나 국민의 선택에 달린 문제입니다. 외국의 예를
들어보면 독일은 내각제로 통일을 달성했고 예멘은 대통령제로 했습니다.
베트남은 무력을 이용해 통합을 이뤄냈지요.

따라서 정치체제나 권력구조는 통일과는 별 관계가 없습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하에서 인권과 소수의견이 존중되는 제도면 된다고
봅니다"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고 계십니까.

"건강을 지키려면 마음을 비워야지요. 운동도 자주하고 여행도 곧잘
떠납니다. 그리고 매일 목욕을 하면서 체중관리도 하고 있지요"

<대담 =이진원정경부장>

(한국경제신문 1995년 6월 2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