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여기는 웬 일이세요? 혼자서." 희봉이 주위를 두리번거려
보며 가서에게 물었다.

"아,술자리도 시시하고 해서 몰래 빠져나와 혼자 산책을 좀 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희봉 아주머니께서 오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데서 단 둘이 만나다니 뭔가 연분이 있는가 봅니다"

가서가 기분이 좋은지 히죽이 웃었다.

"연분이라니.이 사람이 나에게 딴 마음을 품고 있는 모양이로군"

희봉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겉으로는 가서의 말에 맞장구를 치는 듯
활짝 웃어보였다.

가서는 희봉과 교감이 된 줄 알고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빨리 술자리로 돌아가세요. 여기로 혼자 빠져 나온걸 알면 벌주를
톡톡히 받을 거예요"

희봉은 한시라도 빨리 가서를 떼어내고 싶어서 벌주 운운해가며 재촉을
하였다.

"알겠어요. 희봉 아주머니가 말씀하시는데 그대로 따라야죠. 그런데
언제 또 만나볼수 있을까요? 영국부로 놀러가도 워낙 젊으시고 어여쁘셔서
저를 만나주실지 모르겠네요"

가서는 희봉을 다시 만나보고 싶은 마음에 비굴한 미소까지 지었다.

"따져보면 다 일가친척간인데 만나고 안 만나고가 어디 있어요?
시간 나는대로 놀러 오세요. 우리집 어른도 가서 나리 칭찬을 자주
하세요. 오늘 이렇게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니 우리집 어른 말씀이 맞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희봉은 지금 전혀 반대로 이야기하고 있는 셈이었다.

가서는 칭찬까지 듣자 한껏 우쭐해져서 다시 술자리로 돌아갔다.

술자리로 돌아가면서도 가서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며 희봉을 계속
돌아보았다.

그렇게 흘끗흘끗 여우처럼 돌아보는 가서의 눈길이 징그럽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희봉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고 거기 서 있었다.

가서가 모퉁이를 돌아가자 희봉은 자기를 찾으러 온 시녀들과 함께
가석산을 타고 넘어 천향루쪽으로 나아갔다.

희봉이 치마자락을 걷어 쥐고 계단을 지나 천향루 위층으로 올라가니,
가사대감의 아내 형부인과 왕부인,우씨들이 모여 회방원 뜰에서 펼쳐지는
연극을 구경하고 있었다.

"몇 착( 노래를 주로 하는 극의 단위)이나 놀았어요?"

희봉이 부인들에게 물으니 여덟이나 아홉 착쯤 놀았다고 하였다.

우씨가 극 목록이 적힌 희단(희단)을 희봉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여기 와서 술 한잔 하면서 극을 골라봐요"

(한국경제신문 1995년 6월 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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