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기여이 벌어지고 말았구나"하는 생각에 뒤이어 "5년 동안
민족의 넋을 가위누르던 동족상잔이 마침내 오고야 마는구나"하는
순간 갑자기 길이 팽팽 돌고 눈앞이 깜깜하여졌다"

1950년6월26일,평소와 같이 학교연구실에 나갔다가 거리를 질주하는
군용차와 물끓듯 하는 사람들을 보고서야 정말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을
확인한 김성칠(1913~1951)은 길바닥에 주저앉아 땅을 치고 통곡하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당시의 느낌을 일기장에 적어 놓았다.

그리고 "오늘밤에 죽는 일이 있어도 숭업지 않게 깨끗이 죽어야겠다"는
다짐도 덧붙였다.

김성칠은 대구고보 2학년때 독서회 사건으로 검거돼 1년동안 복역한뒤
경성법전과 경성제대사학과를 졸업하고 해방뒤 서울대 문리대사학과
조교수로 있던 젊은 사학자다.

그가 1950년에 편낸 "조선역사"는 해방후에 나온 최초의 국사책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그는 역사가로서 또 하나의 중요한 기록을 남겼다.

3개월동안 인공치하의 서울에 살면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기록한
일기다.

피난도 못간채 좌.우의 어느편에도 서지 않고 서울근교 정릉에서
전쟁을 겪었던 그는 한 역사가의 눈을 가지고 6.25라는 비극적 전쟁의
의미를 진지한 자세로 캐나가고 있다.

"8.15때 비로서 마음놓고 태극기를 그리던 감격이 어제런 듯 새롭건만
오늘은 울부짖는 포화 아래서 또 한개의 국기를 그려야 하다니."

할수없이 인공기를 그리면서 그는 고향인 경북 영천에 있는 아버지가
딴나라 백성이 되어 있는 현실을 통곡한다.

어린 막내가 "동해물과 백두산이."를 부르면 누이가 "장백산 줄기줄기를."
부르라고 욱박지르는 것을 보면서 민족의 비극을 뼈저리게 느기기도 한다.

서울수복후 사위는 인민군으로 끌려가 행방불명이 되고 딸은 부역했다고
감옥에 들어가 외손자들과 씨름하는 친구의 얘기,인민위원회 선거장면,
치열한 시가전,폐허가된 서울의 모습,배가고파 공산당이 되겠다던 어린
조카의 슬픈 이야기,정세에 따라 아부하는 교수들에 대한 준엄한 비판
그 어느 하나 허술하게 기록된 것이 없고 눈앞에 보는 것처럼 생생하다.

그는 부산피난시절 고향에 갔다가 좌경분자에게 저격당해 38세의
젊은 나이로 죽는다.

그러나 그가 남긴 일기는 "역사앞에서 한 사학자의 6.25일기"라는
책으로 묶어져 있다.

어느 작가에 뒤지지 않는 전쟁문학작품으로 꼽힐만 하다.

"우리 겨레의 앞날에 어떠한 고난이라도 오려거든 와보아라.우리의
생명력으로 이를 뚫고 나가려니,뚫고 나가려니" 6.25전쟁 45주년을
맞는 오늘도 그의 외침이 귓가를 울리는듯 하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6월 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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