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나 그 풍경이 아름다운지 시가 저절로 희봉의 마음 속에서 우러날
판이었다.

국화꽃은 온 땅에 만발하고 못가 버들은 늘어질대로 늘어져 있었다.

작은 돌다리가 개천을 가로지르고 구불구불한 오솔길은 깊은 산속으로
이어진 듯했다.

바위 틈 사이로 맑은 물이 은구슬처럼 훌러내리고, 울밑에 핀 각종
꽃들은 그윽한 향기를 풍겼다.

나뭇가지 끝 단풍 든 잎들은 바람에 하늘하늘 흔들리고, 낙엽지는
가을숲은 어느 화가도 그대로 그려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디선가 서풍을 타고 꾀꼬리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고, 따사로운
가을볕 속에서 귀뚜라미가 무료한지 찌르르르 찌르르르 울어대었다.

희봉이 동남쪽으로 시선을 돌려 바라보니 산기슭에 아름드리 나무들을
배경으로 정자들이 띄엄띄엄 늘어서 있었고, 서북쪽을 바라보니 물가에
누각들이 두어 채 우뚝 솟아 있었다.

숲속에서 인듯 생황 부는 소리가 들려 아늑한 정취를 자아내기도
하였다.

희봉은 이런 아름다운 세상을 두고 이제 곧 저 세상으로 떠나갈
진씨를 생각하니 안쓰럽기 그지없어 눈시울이 자꾸만 뜨거워지려고
하였다.

진씨가 시아버지와 정을 통하고 있다는 풍문은 전부터 들어 알고
있는 희봉이었지만, 말도 되지 않는 소리라고 일축해버렸다.

그러나 초대의 난동과 진씨의 와병들을 겪으면서 어쩌면 그 풍문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어찌 할 수 없었다.

그러면 진씨가 병들어 죽는 것은 근친상간에 대한 벌이란 말인가.

진씨를 저 지경으로 만든 가진 대감은 아직도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
진씨만이 그 벌을 받고 죽는다는 것은 같은 여자의 입장에서 볼 때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조물주도 남자라 남자 편을 든단 말인가.

이런 생각들을 하며 가산석(정원에 인위적으로 바위를 모아 만든 산)을
돌아가려는데, 누가 가산석 뒤에서 뛰쳐나오며 인사를 하였다.

"아주머니, 안녕하세요"

희봉은 화들짝 놀라며 그를 쳐다보았다.

"아이구, 놀래라. 가서 나리 아니세요?"

가서는 가씨댁 학당의 스승으로 있는 가대유 어른의 손자로, 가대유가
몸이 아프다든지 하여 학당에 나오지 못할 때에는 대신 학당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는 청년이었다.

나이는 희봉보다 어려 아직 장가도 가지 않았지만, 그래도 가씨댁
아이들의 선생인지라 희봉이 깍듯이 나리라는 호칭을 붙여준 것이었다.

"저를 알아보시는군요"

가서는 희봉이 자기를 알아보자 거의 감격해 하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희봉을 바라보는 가서의 눈길이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았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6월 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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