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불혹을 지난 지천명으로 접어들며 가장 따뜻한 것은 순수한 마음을
나누는 친구들이다.

철든이후 만난 많은 친구들에게서는 찾아볼수 없는 생각만해도 콧잔등이
시큰해지는 어릴적 우정들이 있다.

충청남도 아산의 선장국민학교 38회 동창들이다.

이름하여 "삼봉회",교가에 나오는 삼봉산은 도고골프장을 감싸고 있는
세봉우리의 산이다.

홍안이었던 미소년들의 이마에는 굵은주름이 계급장처럼 붙어있고 바리깡
으로 반은 뜯기고 반은 깍였던 숱많던 검은머리는 이제 속알머리 없는
남자, 주변머리없는 남자, 그리고 희끗희끗한 머리들이 되어버렸다.

꿈많던 어린시절의 커다란 이상들은 인생의 산과 바다를 넘으며 오늘을
살고있다.

우리에겐 빛바랜 흑백사진이 한장있다.

바지저고리를 입고찍은 국민학교 입학기념사진이다.

이미 40년이 지난 코흘리개들의 사진속에는 머리에 기계충이 많았던
친구, 유난히 코를 많이 흘리던 친구, 검정고무신의 희미한 추억들이 안개
처럼 묻혀있다.

특징있는 몇몇 친구들을 찾아 확인하곤 배꼽을 잡는다.

무슨 보물단지마냥 소중히 사진을 간직하고 있던 그 친구도 대단하려니와
이미 희미해진 사진을 가까스로 확대해서 친구들에게 돌려주는 성의야말로
소학교 부랄친구 아니고는 안되리라. 서울에사는 친구뿐아니라 고향을
지키는 친구들의 경조사까지 우정을 나누며 인생을 함께 가고있다.

매 홀수달 셋째 목요일이면 열댓명이 여서 돼지갈비도 뜯고 소주라도 한잔
곁드리노라면 어느새 투박한 충청도 사투리가 좌중을 휘어잡는다.

우리의 만남에는 모두가 평등하다.

목에 힘줄일도 없고 잘난척 할일도 없다.

만일 그랬다간 대번 공격이 날아온다.

거기에는 동대문시장의 한상철사장이 단연 주공격수이다.

이미 작고하신 춘부장 어른들 이름까지 줄줄 외워댈뿐 아니라 각자의
집안내력까지 훑어가기 시작하면 모두들 혀를 내두른다.

스스로 과댁아들임을 밝히면서 누구네 형이 쌀가마 팔아서 옆동네 처녀
하고 야반도주했다는등 본인조차 기억하지못하는 악동시절이야기까지 나오면
우리는 그만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수 밖에 없다.

여기에 박장대소하는 친구들은 이미그때 연애를 시작했다는(?)반장
이철희(동명인쇄), 어쩔수없는 천상 선생님인 유인성(신목국교), 우리모두의
법률고문 김연구(법원)그리고 각자 사업에 바쁜 권영노 권영복 김복기
김진덕 김효식 이두희 이상신 황영성등이 고정멤버다.

특히 우리모임을 생명력있게 끌고가는 원동력은 오랫동안 이모임의
전임회장을 맡았던 충일양복점의 이국영전무의 공이 제일 컷으며 유일하게
동네처녀와 결혼해 일찌기 성실함을 인정받은 모임의 살림꾼 박천규사장,
자타가 공인하는 잉꼬부부이며 정신적지주인 허상국 송천병원 원무부장
등이다.

현재 회장을 맡고있는 나는 잦은 해외출장등으로 소임을 다하지못해
오히려 미안하기만 하다.

원컨대 먼훗날 고향으로 돌아가 귀거래사를 읊을때 열심히 살았던 삶을
인간승리의 주인공들로서 자랑할수 있기를 간절히 바랄뿐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6월 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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