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색기계 제조업체인 경북 구미의 일성기계.

이회사 사장실과 노조위원장실은 항상 비어있다.

자리를 지키고 있는 여직원으로부터 "현장에 나가 계시다"라는 말만 들을
수 있다.

공장에 들어가도 찾기 어렵기는 매한가지다.

모두 똑 같은 복장을 하고 있어서 누가 사장인지 노조위원장인지 알 수
없다.

이회사 창업주인 김원묵사장의 별명은 "김반장"이다.

일흔살의 고령이지만 매일 작업장에 나가 직접 감독하며 생산현장을
챙긴다.

기계설계 도면을 전부 외울 정도로 열심이기 때문에 그 앞에서 조금이라도
잘못된 소리를 했다간 당장 불호령이 떨어진다.

보름간의 미국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는 날도 바로 회사로 나와 공장으로
직행한다.

항상 근로자들과 같은 작업복 차림으로 기름묻은 장갑을 끼고 있는 6척
거구의 김사장을 방문객은 알아볼 수가 없다.

김장수노조위원장도 사장 못지 않다.

회사정문 옆 노조사무실도 주인 보다는 손님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때가 많다.

김위원장은 하루 종일 생산라인을 돌며 조합원들의 고충을 듣고 노조방침
을 설명하고 다닌다.

종업원들에게 김사장이 "잘 되나"라고 묻는데 비해 김위원장은 "힘드나"
라고 웃으며 말을 건네는 것이 다를 뿐이다.

공장에서 하루 종일 돌아다니다 보니 두사람은 자연히 하루에도 몇번씩
만나게 된다.

김사장과 김위원장은 그래서 "우리회사에는 별도의 노사협의회가 필요
없을 정도"라고 입을 모은다.

일성기계는 전체 종업원이 2백여명 남짓되는 중소기업이다.

지난 62년 대구시 북구 태평로에서 창립해 74년 현재의 구미공단에
입주했다.

지난해 매출액은 3백30억원.

염색기 나염기 제직기등 섬유가공기계 종합메이커로 미국 일본 중남미
중국등 세계시장에 수출하고 있다.

지난 93년엔 5백만달러 수출의탑을 수상했다.

최근에는 신규시장으로 각광받고 있는 동남아에서 화교기업들과 경쟁을
벌이느라 기술개발과 품질향상에 전사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 회사는 그동안 수출과 기계국산화에 매진해 경제적 역할을 다하는
동시에 사원을 가족처럼 대하는 기업문화풍토를 조성, 지역사회에도
모범적인 기업으로 이미지를 굳혔다.

금년 초에는 폐결핵을 앓고 있는 중국 근로자를 정성들여 간호해 완쾌
시켜 훈훈한 미담을 전해주기도 했다.

특히 일성기계는 노사관계가 안정된 기업으로 유명하다.

이 회사는 노조가 창립된 지난 82년이래 단 한차례의 분규도 겪지 않았다.

비결은 사장이 "아버지"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데 있다.

김위원장도 "우리 김사장 같은 기업가가 많으면 나라가 잘 될것"이라고까지
자랑한다.

각자 전공기술을 갖고 입사하는 종업원들을 사장이 직접 전문기능인으로
키워오고있다.

현장에 매일 있다보니 개인의 잘잘못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기 때문이다.

파트너인 노조도 창립 14년의 역사만큼 성숙된 활동을 펼치고있다.

87,88년 전국적인 노조설립과 분규 열풍에 잠시 휘말리기도 했지만 극한
상황으로 치닫지는 않았다.

노노간 이견으로 다소 분쟁이 있었을 뿐이었다.

노조의 한 관계자는 "82년 창립된 우리노조와 87년 직후 갓태어난 타회사
노조와는 어른과 아이만큼 인식차이가 컸다"고 회고한다.

이회사 노동조합의 사무실에 가면 "건전하고 생산적인 노사관계 정립"이란
노조활동지표를 찾아볼 수 있다.

그동안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각종 제도도 안착시키고 임금도 공단내
상위수준으로 높여놨다.

이 회사의 임단협은 다섯차례이상 끄는 일이 없다.

서로 신뢰가 바탕이돼있기 때문이다.

회사가 생기고 나서 "징계위원회"는 한번도 열리지 않았다.

종업원들의 평균 연봉은 잔업을 포함해 1천8백40만원이다.

평생직장의 여건을 마련해 올해부터 55세 정년퇴직자를 대상으로
소사장제를 실시하고 있다.

지난해에 처음 나온 정년퇴직자는 현재 프레스압출기의 소사장을 맡고
있다.

2대집행부 때부터 10여년간 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위원장의 노조관은
남다른데가 있다.

중소기업에서는 잦은 집행부 교체가 오히려 노사관계악화요인이란 것이
그의 지론이다.

"새 사람이 나타나면 무엇인가 달라질 것으로 조합원들이 기대하는데
문제가 있다.

그래서 재선되려고 "운동"을 하고 새사람을 세울려고 "바람몰이"를 하는
악순환이 일부 중소기업에서 계속되고 있다.

3년쯤 위원장을 해보면 겨우 조직관리를 익힐수 있다"김위원장의 설명이다.

최근 김사장은 무릎연골이 불편해 집에서 요양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 몫을 김위원장이 하는 일이 많아진 것이다.

그는 현장을 돌며 "사장이 없을때 더욱 부지런히 일하라"고 독려하고 있다.

사장과 종업원들이 한가족 처럼 지내는 모범중소기업의 전형이다.

< 구미=권녕설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6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