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다른 시동생이 되는 건달 녀석에게까지 몸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던
진씨는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은 비참한 세월을 보낸 셈이었다.

그러다가 급기야 바로 그 초대 사건이 터진 것이었다.

그날 왕희봉은 보옥을 데리고 녕국부로 건너가 우씨와 진씨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오랜만에 마음껏 놀았다.

보옥은 거기서 진업의 아들이요, 진씨의 남동생에 해당하는 진종을
처음으로 만나 서로 의기투합하게 되었다.

한참 부인들이 골패놀이를 하며 재미있게 노는데 바깥에서 소란스런
기척이 났다.

우씨가 시녀들을 보내어 무슨 일인가 알아보라고 하였다.

시녀가 와서 아뢰었다.

"초대 어른이 또 술에 취해 욕설을 퍼붓고 행패가 이만 저만 아닙니다"

초대는 원래 하인이었지만 워낙 나이가 많아 시녀들조차 어른 자를
붙여 부르곤 하였다.

"쯔쯔, 이 일을 어쩐담. 초대 어른더러 우리 보옥도련님을 집으로
모셔가라고 했는데. 할 수 없지. 다른 하인에게 시키는 수밖에"

진씨는 늘 있던 일이라 별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는 헤어질 시간이 되자
다른 하인들을 불러 보옥과 희봉을 모셔가라고 지시하였다.

희봉과 보옥이 영국부로 돌아가려고 나서자 녕국부 남자들과 부인들이
주르르 나와 배웅을 해주었다.

그런데 그때까지도 초대는 술에 취하여 총집사인 뇌이를 붙잡고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뭐라구? 이 밤중에 나보고 영국부도련님을 모시라구? 사람을 업신
여겨도 분수가 있지. 너, 총집사라고 사람 깔보는 모양인데 내가 누군지
알지?

가용 도련님의 증조부, 그러니까 가대화 대감도 모신 사람이라구.
내가 어릴적부터 가대화 대감을 모시고 전쟁터만 세번이나 드나들었다구.

한번은 시체더미 속에서 가대화 대감을 구해내어 등에 업고 수백리길을
달려온 적도 있다구.

물 한모금 얻지 못해 쩔쩔매고 있을 때 내가 간신히 물 한바가지를
구해 대감에게 드리고 나는 말 오줌을 마셨다구.

가대화 대감 살아계실 적에는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못했어. 내 앞에서
다들 슬슬 기었다구"
이런 욕설과 술주정들은 초대의 고정 목록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대개
이 정도에서 끝나는 법이었으나 그 날은 사단이 벌어지려고 그랬는지
가용이 합세하여 초대를 꾸짖는 바람에 일이 터지고 말았다.

가용은 영국부 사람들이 있는 앞에서 초대가 계속 행패를 부리자 체면을
세울겸 해서 화가 잔뜩 난 음성으로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놈이 죽고 싶어 환장을 했나. 이놈을 당장 묶어라"

(한국경제신문 1995년 6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