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옥내 무대형 극장이 처음 생겨난 것은 1902년 여름의 일이다.

지금 서울의 새문안예배당이 들어서 있는 자리인 야현에 세워진 500여석
규모의 꽤 큰 극장이었다.

"벽돌로 둥그렇게 쌓은 로마의 콜로세움 축소판 같은 소극장"이었다는
육당 최남선의 설명으로 미루어 보면 이 극장은 계단식 원형극장을
본뜬 것이 아니었나 싶다.

협률사의 신축경위에 대해서는 고종의 등극40주년 경축의식을 거행하기
위해 지었다는 육당의 주장이 전설처럼 여겨져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초대 군악대장이었던 장봉환이 군악대경비 마련을 위해
고종에게 극장건립을 건의한 끝에 하사받은 4만원으로 지었다는 유민송의
설이 더 유력하다.

그렇다면 협률사는 애당초 공연을 위한 극장으로 지어진 것임이
틀림없고 그것이 왕립극장이었음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극장이 신축되자 협률사는 곧 판소리 민요 무용등에 종사하는 예인들
중에서 뽑은 170명의 명인 명창으로 전속단체를 조직했다.

당시의 대중연예인들이 총집합한 셈이다.

그러나 협률사는 개관한지 3년반만인 1906년에 폐관되고 만다.

"창부 기녀들의 풍악으로 국민윤리를 파괴하여 나라의 장래까지 위태롭게
한다"는 사회여론이 비등했기 때문이다.

그 뒤 한동안 고급관리들의 회비로 운영되는 관인구락부로 사용되다가
1908년 박정동 김상천 이인직등이 건물을 대여받아 본격적인 극장인
"원각사"로 재출발하게 된다.

당대 최고의 가기24명과 명창40명등 64명의 호화진용으로 출발한
원각사의 단장은 명장 이동백이 맡았다.

원각사에서는 이인직의 "은세계"가 신영극이라는 이름으로 무대에
올려졌고 창극 "춘향가""천인봉""수중가"등의 공연이 잇달았다.

공연때면 각부 대거들을 포함한 상류층인사들이 몰려들어 고급공연장
구실을 톡톡히 해냈다.

매국노인 송병준과 이완용도 단골손님이었다 한다.

국권상실과 함께 원각사는 기능이 마비되어 1911년 단원들은 해산되고
건물은 공회당처럼 쓰이다가 1914년 봄, 화재로 소실되고 말았다.

덕수궁 뒤에 국악.연극전용 소극장인 ''정동극장''이 ''허생전''을 무대에
올리면서 어제 개관됐다.

이 도심속 새 문화공간이 더 친숙하게 느껴지는 것은 한국 최초의 상설
전통예술 공연장이자 근대 연극의 발상지였던 ''협률사'' ''원각사''의 뜻깊은
전통이 그곳에 이어지기를 기대하는 마음 때문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6월 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