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군 밑에서 정승을 지낸 유후조는 아주 심한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사람이었다.

대원군이 그를 고려때 주려고 수청기생과 하루밤을 보내게 했다.

그 이틀날 대원군은 조관들이 모인 가운데 그 기생을 불러 어젯밤 유정승
이 하던 사투리를 그대로 해 보라고 했다.

완파가 박장대소를 했다.

그는 정승으로서 무안하기 그지 없지만 대원군의 장난끼가 어떤 정도인지
를 잘 알고 있던 터라 쓴웃움을 지을수 밖에 없었다.

사투리에는 때로 유머가 넘쳐 흐르기도 하나 보통 시골뜨기말, 세련
되지 못한 말로 생각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모처럼 고향사람들끼리 만나거나 모이는 자리의 대화수단으로서는
더할 나위없이 정감을 불러 일으키고 소박한 고향내움을 짇게 풍기게 하는게
사투리다.

또한 사투리는 시인 김억이 "사투리"라는 글에서 얘기한 것처럼 각 지방
사람들의 특성을 드러내 주는 수단이 되기로 한다.

평안도 사람들의 성남은 "쌍"하는 한마디로 짐작할수 있고 "할락한다"
소리를 들을 때에는 경상도 사람들의 정다운 어조로 닥아 온다.

"드러운 것"이라는 말에서도 충청도 사람들의 감성을 느끼게 되고 전라도
사람들의 면목은 "히복라면 히보라"는 어조에서 확인된다.

"엇럿쉬까"로는 황해도 사람들의 소박함을 연상할수 있고 "왔소꾸마"로는
함경도 사람들의 질박함을 감지하게 된다.

사투리는 한 언어권인 나라에서는 그 차이가 그리 코지 않아서 서로
다른 투리를 쓰는 사람들이 만나더라도 의사소통에 문제가 별로 없다.

그러나 예외인 경우도 없지않다.

중국인들은 같은 한족으로서 같은 문자를 쓰고 있는데도 성이 달라지게
되면 북경어를 사용하지 않는 한 의사소통이 안될 정도로 사투리의 차이가
극히 심하다.

그에 비해 한민족의 사투리들은 지역간 차이가 두드러지지는 않는다.

통일신라와 발해로 양분되었던 시대 이후로는 통일국가를 줄곧 이루어
왔는데다 협소한 국토를 가지고 있다는 이점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지역적으로 비교적 멀리 떨어져 살아온 두만강부근의 함경도 사람과
제주도 사람 사이에는 자유로운 의사소통이 이루어질수 없는 때가 있었을
것이다.

한민족의 사투리들은 어쩌면 애교가 깃든 차별성을 지닌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매스미디어의 발달로 날이 갈수록 사투리가 퇴색해
가는 느낌을 떨쳐버릴수 없다.

때마침 서울거주 제주출신 인사들이 고향사투리대화모임을 만들어 애향심
을 되살리려 하고 있다는 소식이 잃어버린 향수를 되찾게 해 주는 활력체가
될 것만 같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6월 1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