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채는 금릉에서 장안으로 오는 긴 여행을 해서인지 영국부 이향원으로
들어오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몸이 약해져 기침병을 앓게 되었다.

보채 어머니 설부인(왕부인의 동생이라면 그 성이 왕씨여야 하지만
시집을 오면서 남편 성을 따랐는지 설이모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음)은
보채가 어릴 적부터 앓아 오던 병이 도진 것을 알고,오래 전에 어느
중이 가르쳐준 처방대로 지어놓은 냉향환(냉향환)이라는 약을 꺼내어
보채에게 먹였다.

그러자 보채의 기침병이 차츰 차도를 보이며 나아갔으나 아직 완전히
회복은 되지 않고 있었다.

냉향환은 해상선방이라는 처방에 따라 지어지는데 그 약재를 모으고
배합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다.

봄에 피는 백모란 꽃술 열두냥,여름에 피는 백련 꽃술 열두냥,가을에
피는 백부용 꽃술 열두냥,겨울에 피는 백매화 꽃술 열두냥을 모아
다음해 춘분날 햇볕에 말려 가루약과 함께 잘 섞어 갈고 나서 우수날의
빗물 열두돈,백로날의 이슬 열두돈,상강날의 서리 열두돈,소설날의
눈 열두돈을 배합해서 꿀 열두돈과 설탕 열두돈을 넣고 환약을 만들어
낡은 사기단지에 넣어서 꽃나무 밑에 묻어두고는 병이 도지면 한알씩
꺼내어 황백나무껍질 열두푼을 달인 물로 복용해야 효과가 나는
것이었다.

보채가 병이 나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보옥이 사람을 보내어
문병을 하고 나서 며칠 후에 자기가 직접 이향원으로 보채를 찾아갔다.

먼저 설부인 방으로 가서 인사를 드리자 설부인이 바느질감을 만지다
말고 달려나와 보옥을 꼭 껴안아주며 반가워하였다.

"이렇게 추운 날인데도 우리를 잊지 않고 찾아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자,어서 구들 위로 올라와 앉으려무나"

설부인은 시녀들을 시켜 따끈한 차를 내오도록 하였다.

보옥이 차를 호호 불어가며 마시면서 설부인에게 넌지시 물었다.

"설반 형님은 집에 안 계신가요?"

"그 녀석은 어디 한시라도 집에 붙어 있어야지. 굴레 벗은 망아지처럼
나돌아다니길 좋아한단 말이야. 지금도 놈팡이들과 어울리고 있을 거야"

"보채 누나는요? 요즈음은 몸이 어떤가요?"

"다행히 약을 제때 잘 써서 많이 나았어. 저 안방에 있으니 한번
들어가봐. 나도 이 바느질감을 시녀들에게 맡기고 건너가볼 테니까"

보옥이 안방으로 다가가 문에 드리워진 붉은 명주발을 들추니 보채가
구들 위에 앉아서 고개를 숙이고 바느질에 열중해 있었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6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