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현충일, 매년 맞이하는 날이지만 나는 항상 남다른 감회에 젖게
된다.

어렸을 때의 가슴아픈 기억의 편린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국민학교 5학년때인 1952년 늦가을 어느날, 학교 가는길에 만난 동네
이장집 아들이 나에게 물었다.

"너희집에 별일 없느냐"

뭔가 이상한 생각이 스쳤지만 뭐 별일이 있겠느냐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
했다.

"너희 형한테서 편지오니"하고 묻은 다음 질문에 하루종일 기분이 언짢았고
학교에서도 공부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2~3일에 한번씩 오던 형님 편지가 한달째 끊겼기 때문에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보니 과연 걱정했던대로 통곡소리가 집안에 가득했다.

학도병으로 입대했던 형님이 지리산 전추에서 전사한 것이다.

형님은 나보다 열살위인 스물두살의 건장한 청년이었는데 군에 입대한지
1년여만에 한줌의 재가 되어 돌아왔다.

형님은 군 입대직전에 결혼하여 얼굴도 보지 못한 아들 쌍둥이를 남겼다.

이제 이 아이들은 누가 돌보며 형수는 어떻게 살란말인가.

마른 하늘에 청천벽력이었다.

졸지에 장남이 되어버린 나는 형수와 어린 조카들의 앞날이 항상 걱정
되었다.

그러나 조카들은 다음해 크게 유행한 홍역에 쓰러졌고 형수는 친정으로
보내졌다가 재혼하여 새 삶을 찾았다.

그후 나는 부모님을 위호하고 누님들을 달래면서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지게되었다.

가족중에서 특히 어머니가 가장 슬품을 이기지 못하는 듯하여 안타까웠다.

결국 어머니는 자식의 죽음을 평생의 한으로 가슴속 깊이 묻으신 것같았다.

지난해 2월에 돌아가실때도 마지막 임종의 순간에 형의 이름을 부르셨다.

저 세상에서나마 형이 잘 모셨으면 하는 바램이다.

보훈의 달인 6월에는 호국영령들을 추모하는 행사가 줄을 잇는데 지금
우리가 이만큼 사는 것도 이분들 덕분이다.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께 삼가 명복을 빈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6월 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