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관부에 적혀 있는 세도 가문들은 가씨, 사씨, 왕씨, 설씨 등
이었다.

그드 가문의 직계 자손으로 장안에 몇 집이 올라가 있고 고향에
몇 집이 남아 있는데 그 형편이 어떠어떠하다 라는 식으로 쓰여
있었다.

우촌은 설반이라는 작자를 소환해야 했으므로 설씨 가문에 관한
구절들을 더욱 자세히 살펴보았다.

"풍년에 큰눈이라 진주도 흙덩이 같고 황금도 무쇠 같더라"

직접적으로 설씨라고 지칭은 하지 않고 설과 발음이 같은 설을 가지고
문장을 지어 설씨 댁이 얼마나 재물이 많고 위세등등한가를 표현하고
있었다.

우촌은 그 다음 문장도 읽어보았다.

"자미사인 설공 자손들이 현재 황제의 궁궐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는
일을 맡고 있다. 전부 합해서 여덟 집이라. 자미사인이라면 차관 다음
가는 벼슬이 아닌가"

서기가 기다렸다는 듯이 모리를 조아리며 대답하였다.

"그러하옵니다. 설씨가 대단한 가문입죠. 게다가 이 호관부에 적혀 있는
네 세도 가문은 서로 혼인관계로 얽혀 있어 어느 한 가문에 무슨 일이
생기면 서로 감싸고 돌기 마련이지요.

가씨 댁하고도 친척관계인지라 벌써 가씨 댁 녕국부나 영국부로
연락이 갔을 겁니다.

설반의 어머니는 가정 대감의 아내인 왕부인의 동생이 되지요.

그리고 왕부인의 오빠 왕자등은 경영절도사(수도사령관)로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고요"

"아무리 그렇더라도 재판 송사를 그르칠 수야 있나.

황제 폐하의 특별한 은총으로 복직이 되어 새출발을 하는 각오로
직무에 임하고 있는데, 세도 가문의 눈치나 보며 재판을 할 수야
없지 않느냐?"

우촌은 말은 그렇게 하였지만 곤혹스런 기색이 역력하였다.

우촌의 마음이 동요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서기가 은밀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부사 나으리께서도 이번에 복직을 할때 가정대감의 도움을 톡톡히
받으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세상 만사 다 그렇고 그런 거 아닙니까.

부사 나으리의 그 청렴한 기백대로 세상 일이 돌아간다면야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지도 않지요"

서기가 우촌의 약점을 정곡으로 찌른 셈이었다.

우촌은 손으로 이마를 짚고 한참동안 머리를 숙이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럼 자네 생각에는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설반이라는 작자를 봐주되 송사를 한 원고측이 납득할 만한 판결을
내리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나?"

(한국경제신문 1995년 6월 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