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삼국시대 이전의 우리민족의 풍습과 기질에 대해서는 중국 "이십오사"의
하나인 "위지 동이전"에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돼 있다.

그 가운데 "...사흘을 연이어 노래와 춤을 즐긴다"는 대목이 관심을 끈다.

예부터 우리민족이 노래와 춤을 즐기는 민족임에는 틀림없지만 어떤 노래와
춤을 즐겼는지는 알수 없다.

춤은 고구려 무용총등의 벽화에서 보이는 것처럼 오늘의 춤사위와 유사점이
있어 어느정도 짐작이라도 해보건만 노래는 그마저도 어렵다.

다만 고구려 벽화에서 보이는 춤사위를 통해 노래의 음악적 특성을 짜맞춰
보는 정도다.

"동이전"은 관찰하고 기록한 사람의 주.객관적 시각을 담은 것에 상관없이
"중국인"이라는 타민족이 우리민족의 아이덴티티를 그린 최초의 기록이다.

"동이전"의 관찰자(기록자)는 "우리(중국인)가 사용하는 것처럼 그들
(한국인)도 젓가락을 사용하더라"는 식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중국인들
에게는 없는 문화를 가진데 대한 일종의 충격으로서 우리민족의 아이덴티티
를 기록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 관찰자가 본 문화적 특이성, 즉 종교의식이나 세시풍속,
노동과 여가생활에 나타난 노래와 춤의 일상적인 향유가 한민족이 가진
기질이라는 점을 기록한 것이다.

이것이 우리민족의 정체성이다.

나는 가끔 만약 현대판 "동이전"이 쓰여진다면 우리 모습이 어떻게 기록될
것인지 생각해본다.

그러면 좀 처연해질 수밖에 없다.

우리가 어떤 춤과 노래를 즐긴다고 기록될지를 두려워해서가 아니다.

오늘의 모습에 과거 모습이 보이듯 미래의 모습도 투영되기 때문에
처연해지는 것이다.

얼마전 "세계화"란 말이 주요이슈로 등장한 후 국가정책에서부터 개인
의식체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리가 미래에도 번영된 민족으로 보전되는 수단의 하나로 세계화를 이해
하고 싶다.

현대 물질문명의 한 특징을 "세계를 지구촌으로 만든 커뮤니케이션의
발달"로 규정한다면 "세계화"는 우리가 선택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수단
으로 보인다.

이제 이 "지구촌"에서 사람들은 각기 다양한 문화의 교류를 통해 강도높은
경쟁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경쟁이라는 소프트한 용어대신 무역전쟁같은 무시무시한 용어가 더
어울리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렇다면 "세계화"는 그러한 전쟁을 위한 전술임에 분명하다.

그것도 조그만 실수조차 용인될 수 없는 절대적 가치체계가 아닌가.

그렇다고 세계화를 어렵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작은 지구촌"에 불고 있는 이 거센 바람에 우리가 탄 배의 돛의 방향을
잘 맞추면 어려울 것도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람의 방향도 알아야겠지만 먼저 돛이 어떤지를 점검
해야 한다.

우리민족이 형성된 때로부터 오랜 세월동안 찬란히 꽃피운 문화의 총화가
바로 우리의 정체성이다.

이것이 우리를 미래로 이끌고가는 돛이다.

"동이전"이 말하는 우리의 아이덴티티가 어떻게 변화돼 왔는지, 변질되거나
잃어버린 것은 없는지 챙겨봐야 할 때다.

국악계의 현재는 어떠한가.

과연 민족음악으로서의 국악이 온당한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가.

조기교육에 소홀한 오늘의 국악교육이 오늘의 정체성을 제고하는데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는 않고 있는지 묻고 싶다.

우리의 정체성 파괴가 오존층 파괴처럼 엄청난 부정적 결과를 초래할 것
임은 자명하다.

남에게 줄수 있는 우리만의 것이 없다면 교류해야 살아남는 법칙으로
짜여진 세계질서속에서 번영은 고사하고 살아남을 수도 없을 것이다.

이제 해외로 들고가는 가방에, 선적되는 컨테이너에 우리의 문화가
채워져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들 가슴속에 우리것이 채워져야 한다.

선조로부터 무엇을 이어받았는가보다 무엇을 후손에 물려줄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6월 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