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풍속이 어찌 이지경에 이르렀느냐"

1475년 4월21일 과천사람 김울산이 제 어미를 죽였다는 보고를 받은
성종은 고금에 드문 ''시모죄인''의 이야기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로부터 사흘뒤 성종이 보고받은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김울산은 평소에 집안일을 돌보지 않고 몸치장을 한뒤 이웃집에 가서
서울 장사치들과 어울려 술만 마시는 어미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다.

하루는 그의 아비가 집에 손님을 초청했는데 술이 떨어졌다.

김울산은 어미에게 "이웃집에 술을 다 퍼다주고 정작 손님대접은
못하게 하느냐"고 대들었다. 어미가 그를 때리려 들자 그는 홧김에
낫을 휘둘러 어미의 목을 찔렀다.

그해 5월1일 내려진 이 사건에 대한 성종의 판결은 단호했다.

"도성사람을 모아 그들이 보는 앞에서 양다리를 찢어죽이는 ''환열''에
처하고 각도에 그 시체를 보내 경계로 삼게 하라"

''성종실록''에 실려 있는 이야기다.

이보다 20여년전인 ''단종실록'' 1454년 4월18일조에도 ''시모죄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경상도 양산에 사는 이건원은 나이어린 향교생도였는데 평소 바람둥이
어미의 실행때문에 고민하고 있었다.

동료생도들이 어미의 실행을 트집잡아 자신을 향교에서 내쫓으려 한다는
소문을 들은 그는 향교에 가지않으려 했다.

어느날 그의 어미가 글을 배우러 가지 않는다고 몹시 책망하자 그는
어미의 실행을 따지고 들었다.

노한 어미는 그의 머리채를 꺼두르며 분풀이를 하고 그는 엉겁결에
과도로 어미의 옆구리를 찔렀다. 이건원 역시 환열형을 받은 것은
물론이다.

500여년전 동방예의지국에서 일어난 이 두건의 ''시모사건''은 모두 어미의
실행이 바탕에 깔려 있는 젊은이의 우발적 범행이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특히 향교생도였던 이건원은 10대의 사춘기 소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며칠전 어머니를 야구방망이로 쳐 숨지게한 14세 소년의 우발적 범행은
비슷한 또래의 자녀를 둔 부모들에게 올바른 자녀교육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를 심각하게 반성해보는 기회가 될것 같다.

또 이제는 이런 패륜을 ''통탄할 일''로만 개탄하고 지나쳐서는 안되겠다는
자각도 불러일으키고 있다.

옛날 춘추전국시대에 주나라의 정공이 어떤 자가 아비를 죽였다는 소리를
듣고 놀라서 벌떡 일어나 "이는 나의 죄다"라고 했다는 말이 생각난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5월 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