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그때였다.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나더니 시녀가 들어와 비씩 웃으며 아뢰었다.

"보옥 도련님이 오십니다"

대옥은 보옥에 대해 왕부인에게서 들은 말이 있는지라 바짝 긴장하며
호기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시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앳된 귀공자 한 사람이 방으로 성큼
들어섰다.

"아"

대옥은 자기도 모르게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이상한 일도 다 있구나, 어디서 꼭 본 얼굴이야. 왜 이리 눈에
익을까"

대옥은 고객을 갸우뚱하며 보옥에게서 시선을 뗄 줄 몰랐다.

머리에 쓴 자금관, 이마를 두른 황금빛 머리띠, 나비떼를 수놓은
비단도포, 꽃 모양의 술이 달린 허리띠, 여덟 개의 동그라미 무늬가
박인 마고자, 하얀 바닥을 댄 검정 비단 장화.

그 모든 것들보다 더욱 대옥의 시선을 끈 것은 뿔 없는 용을 새긴
금목걸이에 오색 비단실로 매단 예쁜 옥구슬이었다.

"저게 바로 보옥 오빠가 태어날 때 입에 물고 왔다는 그 구슬이구나"

대옥은 그 옥구슬을 한번 살펴보고 만져보고 싶어 안달이 날 지경
이었다.

왕부인이 보옥을 멀리하라고 경계한 말도 그 순간에는 그만 잊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보옥의 얼굴이 대옥의 마음을 사로잡고 말았다.

"할머님, 사당에서 돌아왔습니다"

보옥이 머리 숙여 대부인에게 인사를 올렸다.

"오냐. 기특도 하지. 우선 네 에미에게 가서 인사하고 오려무나"

보옥은 대옥을 한번 슬쩍 훔쳐보고 나서 대부인이 시키는 대로
어머니인 왕부인에게 인사를 하러 밖으로 나갔다.

대옥은 보옥이 방을 나갔는데도 그 훤한 얼굴이 여전히 방을 비추고
있는 듯이 여겨졌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시가 한 수 흘러나왔다.

팔월 보름달 같은 얼굴, 봄날 새벽에 피는 꽃 같은 살결, 칼로
살짝 벤 듯한 귀밑머리, 먹으로 그린 듯한 까만 눈썹, 복숭아 꽃잎
같은 양쪽 뺨, 가을날 호수 같은 눈동자, 저분은 비록 성을 낼 때도
웃는 듯하고 눈을 부릅뜰 때도 정이 넘치리라, 보옥은 어머니에게
인사를 드린 후 다시 할머니 대부인이 있는 곳으로 왔다.

그런데 어느새 옷을 갈아입었는지 차림새가 달라져 있었다.

대부인이 빙긋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벌써 옷을 갈아있었구나. 여기 이 손님에게 인사도 하기 전에.
자, 네 누이다. 인사해라"

(한국경제신문 1995년 5월 2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