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인께서 저녁식사에 오라십니다"

시녀가 들어와서 왕부인에게 전갈하자 왕부인이 대옥을 데리고 뒷문을
나서 여러 샛문과 사잇길, 행랑들을 지나 대부인이 계신 집으로 왔다.

왕부인과 대옥이 방으로 들어서자 시녀들이 식탁을 차리기 시작하고
부인들도 옆에서 거들어주었다.

가주의 아내 이환은 밥을 뜨고 희봉은 수저를 놓고 왕부인은 국그릇을
날랐다.

대부인은 정면의 길쭉한 의자에 앉아 있고,식탁 양쪽으로 빈 의자가
네개씩 놓여 있었다.

희봉이 대옥을 끌어다가 왼쪽 첫번째 의자에 앉도록 하였다.

그 자리는 윗자리였기 때문에 대옥이 앉기를 망설이자 대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넌 오늘 귀한 손님이니까 그 자리에 앉아도 되느니라"

대옥이 송구스런 자세로 그 자리에 앉은 다음, 왕부인과 영춘,
석춘들이 차례대로 앉았다.

시녀들은 그 옆에서 손에 행주와 양치그릇, 수건들을 들고 서 있었다.

이환과 희봉은 여전히 상머리에 서서 식사시중을 들었다.

바깥방과 마루에는 수많은 식모와 시녀들이 있었으나 기침소리 하나
없이 조용하기만 하였다.

식사가 끝나자 시녀들이 차반에 찻잔을 받쳐들고 들어왔다.

대옥은 차는 식후에 얼마 있다가 마셔야 좋다는 말을 아버지로부터
듣고 집에서는 죽 그렇게 해왔는데, 여기서는 식후에 곧바로 차가
나왔다.

그러나 여기로 온 이상 이 곳의 관습대로 따르지 않을 수 없어 차를
받아놓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시녀가 양치그릇을 가져왔다.

대옥은 다른 여자들이 하는 것을 훔쳐보며 그들이 하는대로 양치질을
하고 떠주는 물에 손도 씻었다.

대옥은 이제부터 이 집의 식사습관을 비롯하여 갖가지 낯선 습관들을
하나하나 익혀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막막한 기분이 들면서 고향집과
아버지가 그리워졌다.

또 얼마 있다 차가 나왔다.

대옥은 그 차는 고향집에서 마시는 것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마셨다.

차 마시는 일이 끝나자 대부인이 부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너희들은 모두 돌아가거라. 우리끼리 할 이야기가 있으니"

왕부인이 이환과 희봉을 거느리고 나갔다.

그들이 나간 후에 대부인이 대옥에게 물었다.

"책은 어떤 것들을 읽었느냐?"

"저는 사서 밖에 못 읽었습니다"

"사서라면 여범첩록, 여계, 여논어, 내훈을 읽었다는 말이구나.
여자들의 초학독본들은 다 읽었구나. 기특도 하지"

"할머니, 언니들은 어떤 책들을 읽었습니까?"

"읽기는 뭘 읽어. 몇자 아는 것뿐, 까막눈들이지"

(한국경제신문 1995년 5월 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