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기계.B기공.C물산 투자유망"

자본재산업 육성대책이 발표된 직후인 지난 12일, 한 증권회사는 기업
정보지에 이렇게 제목을 뽑았다.

"예상 수혜종목"을 다룬 기사였다.

사실 A기계는 창립 20년째의 "젊은" 기업으로 최근 CNC(컴퓨터 수치제어)
피스톤 가공기 국산화에 성공하는등 전도양양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B기공은 공업용로 열교환기등에서 역시 야심찬 국산화 개발을 선도해온
기업.

C물산은 체질개혁에 몸부림쳐왔다.

범용 계측기는 상당수 설비를 중국으로 이전했다.

대신 국내에서는 파형관측기 커넥터등 고부가 전자정밀계측기 개발에
주력해 왔다.

그럼에도 이들 기업은 증시에선 "별볼 일 없는" 종목으로 찬밥 대접을
받아왔다.

주가가 1만원-2만원선으로 만년 중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해 왔다는게 그
증좌다.

정보지는 정부의 육성책이 제대로만 실시된다면 이들 기업에도 "햇볕"이
내려쬐일 것으로 진단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지적마따나 기계관련 업체들은 정부의 "획기적인" 육성책 발표로
모처럼 제철을 만났다.

이들 3개사외에 E중공업 F기계 G중공업 H정공등도 "수혜종목" 대접을
받았다.

적어도 증시에선 그랬다.

발표직후 매기가 집중됐다가 매매차익을 노린 매물이 쏟아지는 바람에
주가가 되떨어진 기업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모든 기계업체들이 이런 "유망 대접"을 받는 건 아니다.

주식투자가들은 커녕 수요업체들로부터조차 외면받는 기업들이 훨씬 더
많은게 현실이다.

사실 어렵사리 창업해 무진 노력과 고생끝에 기계류를 자체 개발하고도
꽃을 채 피우지 못한채 스러지는 기업들이 적지 않다.

판로를 확보하지 못해 "개발 고생"보다 "판매 고생"을 훨씬 더 심하게
겪어야 하는 건 물론이고.

그게 한국의 현주소다.

이런 현상은 최종 기계류를 조립하는 기업보다는 중간 기자재나 부품을
생산하는 기업들일수록 더 두드러진다.

예를 들어보자.

전동 액추에이터를 개발한 M사.

이 회사는 얼마전 인천 마산 옥천등 지방자치단체가 발주한 정수장과
하수장용 설비입찰에 이 기계를 들고 응찰했다가 그만 "미역국"을 먹었다.

이탈리아 회사에 밀려버린 것이다.

생산기술연구원에 성능비교를 의뢰해 "이탈리아제에 못지않다"는 평가를
받아냈는데도 그랬다.

이유는 "과거 납품실적이 없으니 품질을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식품기계업체인 D사도 비슷한 이유로 낭패를 봤다.

축산물 자동처리기계를 국산화 개발하고는 식품회사들에 들고갔으나 하나
같이 "이전 것을 사용하는데 익숙해 있다"는 말만을 들어야 했다.

네덜란드제등 "이전 것"들의 벽만을 느껴야 했다.

예는 얼마든지 더 있다.

S사는 고압 냉수.온수세척기를 개발했음에도 국영기업에서조차 "퇴짜"를
맞았다.

H사도 이 국영기업에 큰 돈을 들여 갓 개발한 열교환기를 들고갔다가
"일본기계를 잘 쓰고있는데 무슨 소리냐"는 문전박대만을 당해야 했다.

"자본재 입국"의 저변을 이뤄보려는 전문 기계.부품업체들에게 이건
엄청난 지뢰밭이다.

문제는 지뢰밭이 이런 국내 수요업체들의 "박절함"에만 있는 것도 아니라는
데 있다.

더 무서운 지뢰밭은 외국업체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써먹는 "씨말리기
전법"이다.

국산기계가 개발이라도 됐다 싶으면 대짜고짜 덤핑부터 치고나오는 거다.

S기계가 일본업체들로부터 당하고 있는게 그 대표적 경우로 통한다.

이 회사가 2년전 전량 수입에 의존해온 워터제트직기를 국산화하자 일본
기업들이 즉각 대한수출가격을 대당 3백53만엔에서 2백20만엔으로 38%나
떨어뜨린 것.

최근 또다른 S사가 사료배합기를 개발하자 독점 공급해온 미국업체가
동일제품 가격을 10%이상 낮춰 "한국 국산개발기계 고사작전"을 펴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 경우다.

이렇게 보면 국내 기계업체들이 제2,제3의 A기계.B기공으로 뻗어날 수 있기
위해선 정부가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결론이 나온다.

안팎의 지뢰밭을 제거해 주는 일이 그것이다.

한국 산업의 텃밭은 자본재업체들이다.

이들이 어렵게 이룬 창업을 "수성"하는 일은 민관 모두의 몫이다.

<이학영기자>

(한국경제신문 1995년 5월 15일자).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