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담에 "왕지네는 죽어도 굳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이,녕국부와
영국부가 퇴락해가고 있어도 겉으로는 옛날 영화가 남아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

점점 식솔들은 늘어나고 할 일들은 쌓여만 가는데 위에서부터 시작하여
아랫것들까지 열심히 일할 생각들은 하지 않고 빈둥거리고 있단 말일세.
자녀교육에도 신경들을 쓰지 않고 되는대로 내버려두고 있고 말이야"

자홍이 옆에 앉은 주모의 허벅지를 슬쩍 손바닥으로 문대며 걱정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다른 집이라면 몰라도 녕국부와 영국부에서 자녀교육을 등한히 하다니.
대대로 자녀교육에 엄격하기로 소문이 났는데"

우촌은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자,내 이야기를 들어보게나. 장안의 그 가씨가문이 어떤 형편에
놓여있는가를 들어보란 말일세"

그러면서 자홍이 녕국부와 영국부에 대하여 들려준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녕국공 가연과 영국공 가원은 한 어머니가 낳은 친형제였다.

형인 가연에게는 아들 네 형제가 있었는데 가연이 죽자 맏아들인 가대화
에게로 작위가 이어졌다.

가대화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맏아들인 가부는 어린 나이에 죽고
둘째 아들인 가경에게로 작위가 이어졌다.

그런데 그 가경이라는 사람이 괴짜였다.

옛날 진시황이 만들다가 실패한 그 불로장생약을 자기가 만든다고
야단이었다.

작위도 일찌감치 가진이라는 아들에게 넘겨주고는 산이나 들로 쏘다니며
약초를 캐기에 여념이 없었다.

마치 신선이라도 된 양 도인들과 어울려 누더기 차림에 해괴한 언행을
하며,신선가를 부른답시고 "믿지 못할 고향보다 타향이 그립도다"어쩌고
하면서 집으로 돌아올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가문의 흥망성쇠 같은 것이야 안중에 있을 리가 없었다.

불로장생약을 만든다고 희한한 약초들을 캐와서 약탕기에 며칠이고
끓여서 환약으로 뭉쳐 복용하고는 그만 기절을 한적도 있었다.

가경으로부터 작위를 물려받은 가진은 일찍부터 아버지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서 그런지 글읽는 일을 쓴약 마시기보다 더 싫어하고 여자들만
밝히며 난봉질에 이골이 날 정도였다.

아버지 가경은 신선놀음 하느라고 집안에 관심이 없고 아들 가진은
농탕질 하느라고 집안에 관심이 없으니 그 집안이 제대로 될 리가
만무하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가경과 가진을 말릴 엄두를 내지못했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5월 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