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신문이 일간경제신문이란 제호로 창간의 고고성을 울린 1964년은
한국 재계사에선 "창업의 년대"로 기록돼있다.

"일간경제" 창간을 전후해 오늘의 재계를 이끌고있는 대기업들이 잇달아
창업의 싹을 틔워낸것.당시 정부가 내건 "탈미원조체질 자립경제구축"의
정책의지가 창업러시의 자양분이 됐다.

한일합섬공업이 한국 화학섬유산업의 파이오니어를 자임하며 설립된 것은
일간경제신문 창간(10월12일)을 110여일 앞선 64년6월22일이었고,종합
철강그룹의 모태가 된 동부제강은 그 사흘뒤인 6월25일에 창업됐다.

훗날 현대그룹에 합류한 인천제철은 이해 9월1일,삼성계열의 한국비료는
8월27일에 각각 탄생했다.

이밖에도 섬유분야의 동국무역(65년) 고려합섬(66년) 동양나이론(66년)이
속속 출범했고 67년에는 "세계경영"을 트레이드 마크삼아 국내외시장을
누비고있는 대우그룹의 모체 대우실업이 수출신화를 잉태한채 출범의
닻을 올렸다.

이렇듯 일간경제신문 창간을 전후한 시기는 그야말로 창업의 시절이었다.

62년부터 시작된 제1차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순조롭게 진전되면서 "하면
된다"는 자신감이 정책당국자들은 물론 기업인들사이에도 점점 뿌리를
내렸고,그 결실이 기업들의 잇단 창업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때를 대기업형성 제2기가 막 시작된 시기로 보고있다.

45년 해방과 더불어 국내에 본격 형성된 대기업집단은 "물자부족"이
그 생성의 키워드였다.

제당.제분.방직등 이른바 3백산업분야의 기업들이 60년대초까지 이어진
대기업형성 제1기를 주름잡은게 이를 말해준다.

삼성(이병철) 동양(이양구) 삼양사(김년수) 대한제분(이한원)등은 제당과
제분으로,삼호(정재호)는 방직으로 당시 재계를 이끌었다.

여기에 자유당정부로부터 헐값에 불하받은 귀속재산(일명 적산)을
한밑천삼아 형성된 기업들이 1기 재계시대의 두터운 층을 쌓아올렸다.

조선유지(한화그룹 전신) 선경직물 소화기린맥주(두산그룹 전신)
금성방직(쌍용그룹 전신)등이 적산기업으로부터 일약 대표적 대기업의
반열에 올라선 업체들이었다.

그러나 60년대들어 본격 추진된 수출주도형 개발정책은 이런 내수주도형
재계판도에 일대 전환을 몰고오면서 제2기 시대가 열린 것이다.

당시 정부가 박차를 가한 수출드라이브 정책의 첫 가시적 이정표는
일간경제신문이 창간된지 불과 40여일만에 날아든 첫 "수출 1억달러
고지달성"이란 낭보였다.

"한은집계에 의하면 30일 오후3시현재로 수출실적(입금기준)이 1억
달러선을 돌파했다" 지난 64년12월1일 일간경제신문은 전날의 수출
1억달러돌파 사실을 1면 머릿기사로 보도했다.

64년의 "수출한국"을 대표한 재계의 스타들은 오늘의 잣대로 본다면
업종상 보잘것 없는 기업들이었다.

이해 12월 수출 1억달러 돌파를 기념해 처음 열린 제1회 수출의날
행사에서 기업최고의 영예였던 대통령식산포장을 받은 기업인은
모두 7명이었던 것으로 일간경제신문은 보도하고 있다.

삼호무역의 정재설사장,천우사의 전택보사장,영풍상사의 장병희사장,
동명목재상사의 강석진사장,성창기업의 정태성사장,판본무역의 서갑호
사장,삼성물산의 김선필사장이 그 주인공들이었다.

이중 천우사 동명목재 성창기업은 합판,삼호무역 판본무역 삼성물산은
방직등 섬유분야의 제조및 무역업체였고 영풍상사는 아연등 광산물을
캐내 수출하는 기업이었다.

66년5월 본지가 국내에서 처음 매출액개념을 도입해 보도한 65년기준
매출액 상위 10대기업을 보자.

동명목재.금성방직.판본방적.경성방직.대한모직.동일방직.동신화학.
대한제분.제일제당.충주비료가 그 반열에 올랐다.

이중 한국최대의 외형을 자랑했던 동명목재의 65년매출은 24억3,000만원.

지난해 국내 매출1위를 차지한 삼성물산의 연간외형이 15조원을 넘은
것과 비교하면 6,000분의1에도 못미치는 수준이다.

그러나 이후 국내 재계엔 상전벽해의 판도변화가 본격적으로 일기
시작한다.

정부개발정책의 본격 점화와 수출촉진및 독과점이익 보장정책등에
힘입어서였다.

판본(방적) 대한제분(제분및 중석수출) 동일(방적)등이 서서히 재계
선두그룹에서 밀려나면서 한진(운수및 항공) 신진(자동차) 쌍용(시멘트)
한화(화학및 정유) 대농(섬유및 양곡수입업)등이 혜성처럼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 계기가 된 주요 "사건"들이 6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잇달아
빚어진 것.65년10월13일자 현대경제일보(일간경제신문 후신)는 1면에
"그 용명 드높이고 돌아오라"는 컷제목과 함께 주력부대인 육군
맹호부대의 파월사실을 보도하고 있다.

군의 월남파병과 함께 당시 국내기업들이 잇달아 월남에 진출하면서
이후 중동등 해외진출의 기폭제로 삼게 된다.

한진그룹이 오늘날 육.해.공을 장악한 운송재벌로 성장할수 있었던
출발점이 월남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고 현대그룹이 오늘의 세계적
중화학 콩글로머리트(복합대기업)로 뻗어난 도약대도 월남전쟁이었다.

현대건설의 사실상 첫 해외수주가 이뤄진게 66년1월의 월남 캄란만
준설공사였기 때문이다.

이어 나타난게 정부의 본격적인 중화학공업 육성정책.현대경제일보는
66년1월8일자에서 "종합제철건설 더욱 박차"라는 제목아래 정부의 제철
기계등 중화학공업 육성시책이 적극화될 것임을 예고했다.

실제로 이때부터 중화학공업으로 사업구조를 변신시킨 대기업그룹과
그렇지못한 그룹간의 우열이 발생하기 시작,중화학시책이 꽃을 피운
70년대이후엔 뚜렷한 양극화현상을 보이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재계 3기에 접어든 70년대초 제1차 오일쇼크로 홍역을 치르는등
국내외 경제환경이 악화되면서 정부는 자금지원을 중화학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또 종합상사제도를 도입하는등 수출드라이브를 강력하게 걸면서
대기업들마다 수출에 총력전을 펴고 나선다.

오일쇼크의 반대급부로 한국경제에 "제2의 월남특수"를 안겨다준
중동건설경기 붐이 인것도 이때를 전후해서였다.

열사의 사막에서 건설로 달러를 긁어모은 현대그룹이 79년에 삼성그룹을
제치고 대기업순위 1위를 차지하면서 "현대신화"를 창조하기 시작한다.

대우그룹은 수출드라이브를 등에 업고 당당 재계4위로 떠오르면서
"대우신화"를 만들어냈고 재계판도는 이 시기를 기점으로 점차 안정되기
시작한다.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에 따라 관련산업에 말뚝을 박은 기업은
계속 입지를 강화해 나갔지만 중공업으로 사업구조를 탈바꿈하지 못한
기업은 점차 밀려나가기 시작한다.

정부가 중화학공업에 진출한 기업에는 세제.금융상의 특혜를 베풀었기
때문이다.

재계 4기에 해당하는 5공화국(80년)이후 현재까지의 시기는 3기의
중공업진출 러시에 이어 대기업들의 반도체 신소재 정밀화학 항공우주
통신등 첨단산업에 대한 진출과 투자가 부쩍 증가해왔다.

특히 이 시기는 현대와 삼성이 재계선두를 3위이하 대기업그룹과 엄청난
격차로 따돌리고 쌍두마차를 형성하고 있는 점이 돋보인다.

해방이후 얼마되지 않은 짧은 기간동안 수없이 명멸한 대기업들의
부침사는 기업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혁신( innovation )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변신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고있다.

< 이학영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5월 2일자).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