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가쁘게 달려온 30년.

보릿고개 넘기기도 벅찼지만 이젠 선진국 입성을 위해 대문을 두드리고
있다.

"하면된다"는 신념이 이루어낸 신화라고 하면 지나친 자화자찬일까.

질곡도 많았고 고통도 컸다.

하지만 위기를 겪을 때마다 역량과 기지로 어려움을 극복했다.

우리경제와 고락을 함께한 한국경제신문 1만호의 지령에는 이같은 역정이
낱낱이 들어있다.

화폐가치가 떨어져 30년전과 외형을 비교한다는게 의미가 없기는 하지만
얼추 비교하면 1인당 GNP(국민총생산)는 100배, 국가재정은 500배, 은행
예금은 1,000배로 불었다.

자동차생산은 1만배,철강생산은 10만배를 넘었다.

한국경제신문이 창간된 것은 64년10월26일(당시엔 일간경제신문)이었다.

1차5개년계획(62~66년) 3년차 되는 해다.

그해 1인당 GNP는 100달러를 갓 넘은 103달러였다.

제조업 사업체수는 1만8,000개로 연간 자동차생산 140대, 화학섬유생산은
263t, 석유류생산은 4,843배럴이었다.

민간항공기는 14대(61년) 밖에 없었고 선박의 선적능력은 지금의 대형
유조선 1척에도 못미치는 25만6,000GT( " )에 불과했다.

지금과 비교하면 마치 구멍가게를 연상케 한다.

연간누적 수출액이 1억달러를 "돌파"한 것도 그해(11월30일 오후3시)다.

66년 6월엔 2차5개년계획(67~71년)을 내놓았다.

아직은 영농의 과학화가 강조되는 수준이었다.

67년12월21일 국내 첫 고속도로인 경인고속도로와 경수고속도로가 개통
된다.

70년7월에 역사적인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됐다.

본지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꿀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71년2월에 3차5개년계획(72~76년)을 발표했다.

76년엔 1인당 GNP를 389달러로 끌어올린다는게 목표였다.

73년7월에는 포항제철이 준공돼 공업화를 위한 또하나의 전기가 마련된다.

1인당 GNP 1,000달러라는 장미빛수치가 나온게 76년6월 발표된 4차5개년
계획(77~81년)에서다.

76년엔 국산 포니승용차 6대가 에콰도르에 처녀수출됐고 77년12월22일엔
급기야 수출액이 100억달러를 넘어섰다.

놀랄만한 속도로 커오던 우리경제는 70년대말 정치적 불안과 함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10.26사건 이듬해인 80년에 경제성장률은 5.7% 감소를 기록, 60년대이후
첫 마이너스성장을 경험한다.

본지도 이해에 제호를 지금의 한국경제신문으로 바꾸었다.

81년에 발표한 5차5개년계획(82~86년)에서는 연평균 성장률을 7.6%로
낮추어 잡고 "성장"보다는 "안정"이라는 경제가치전환을 모색하게 된다.

하지만 성장일변도에 가려졌던 부실한 하부구조는 급기야 대형경제사고로
이어진다.

82년의 이.장사건, 83년의 명성그룹과 영동개발진흥사건 광명부도등이
그것이다.

84년에 해운업통폐합, 85년엔 국제그룹 해체등으로 어수선한 상황이
이어졌다.

그런 가운데서도 강력한 안정화시책으로 기반은 착실히 다져졌다.

86년엔 포니엑셀이 미국수출길에 오르기도 했다.

3저호황을 타고 그해에 처음 이룩한 국제수지 흑자의 신기원은 89년까지
이어지고 이 기간중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10.2%를 기록했다.

정치적 불안과 극심한 노사분규 속에서도 경제성장은 순조로웠고 88년
서울올림픽을 개최한 이후엔 구공산권 국가들과의 잇단 수교로 "북방시대"
라는 새장을 열었다.

한때 "총체적 난국"이라는 조어가 유행하기도 했지만 숱한 위기를 딛고
일어선 우리경제는 이제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신청을 내는 또다른
자신감을 보여주고 있다.

1인당 GNP는 올해중으로 1만달러를 넘어선다.

전체 GNP규모론 세계12위다.

메모리반도체와 컬러TV 생산은 세계1위, 조선은 2위, 자동차와 석유화학
제품 생산은 세계5위, 철강생산은 6위까지 올라있는게 한국경제의 자화상
이다.

아직은 다소 불비한 하부구조를 다듬어 질적인 선진화를 이루어내는게
한국경제신문 지령2만호 때까지 추구해야 할 과제인 셈이다.

< 정만호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5월 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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