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호민 < 산업디자인포장개발원장 >


세계 13위.

대국 러시아를 제치고 세계무역시장에서 수출강국으로 우뚝 올라선
우리나라의 94년도 무역성적이다.

제3자가 볼때 경제 우등생이라 할만하다.

과연 우리는 다가오는 21세기에 선진국과 경쟁하고 변화하는 세계경제의
흐름을 헤쳐갈 수 있는 체제를 갖추고 있는가.

필자가 종사하고 있는 산업디자인 분야를 생각해본다면 선진국은 물론
대만 홍콩 싱가포르등 경쟁국에 비해서도 그 수준이 뒤떨어져 국제무대에서
의 우리상품의 위상이 매우 위태로운 현실이다.

흔히 기술력과 산업디자인 수준은 국가경쟁력의 양대 핵심축이라고 한다.

이중 현실적으로 미.일 의존이 큰 기술분야가 선진국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오랜 기간 막대한 투자가 필요하므로 단시일내에 고부가가치를 창출해주는
산업디자인 부문이라도 경쟁국을 앞서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딱하다.

필자는 KIDP(산업디자인포장개발원)원장에 부임한 이래 우리나라 산업
디자인이 선진화를 이루는 가장 빠른 길은 무엇일까를 고민해 왔으나 결국
문제해결의 출발점은 교육개혁에서 찾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산업디자인은 미적 가치와 함께 공학적 요소, 그리고 최종적으로 소비자의
선택을 중요시하므로 순수미술과는 엄격히 구분되는 분야다.

즉 "보는 즐거움"과 함께 "사용하는 즐거움"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때문에 미국 대학의 산업디자인 관련 학과는 공대와 미대에
각각 50대50으로 개설되어 있으며 서유럽 국가들은 아예 산업디자인분야를
특화시켜 단과대성격의 디자인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30년전의 서유럽국가 상황과 비슷한 상태로서 산업디자인
관련 학과의 90%이상이 예술.미술대에 속해 있다.

따라서 미적인 면에 치우쳐 산업현장과의 유기적인 결합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아 왔으며 그동안 "제품따로" "디자인따로"의 기현상을 피할수
없었다.

우리도 창의적이고 유능한 전문인력을 길러내고 산업디자인을 현장에
보다 근접시키기 위해서는 조속히 유럽 또는 미국의 선진적 형태를 수용해야
한다.

네덜란드의 세계적인 디자인스쿨인 "AIVE"는 목재 철제 플라스틱 세라믹등
소재별 특수작업장과 편물 실크스크린 사진스튜디오 화학실험실과 CAD실등
첨단시설을 갖추고 "인간중심의 디자인"이란 대주제하에 실기위주의 집중
교육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65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미국과 스위스의 아트센터는 프로정신 함양을
교육철학으로 하여 교육과정의 대부분을 실제 기업의 프로젝트로 구성하여
학생들이 일찍부터 산.학협동체계에 익숙케 하고 있으며 그동안 배출된
8,000여명의 아트센터 졸업생들은 전세계 기업의 중견디자이너로 확고부동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필자는 지난 3월중순께 프랑스의 산업디자인 전문대학원인 엔시(ENSCI)를
방문하였다.

82년에 설립된 엔시는 제품디자인에 있어 독일및 북구 여러 나라에 비해
뒤져있던 프랑스가 "디자인입국"의 야심찬 기치를 내걸고 산업디자인을
집중 육성하기 위해 정부가 특별히 설립한 학교다.

누구보다 디자인에 대한 자긍심이 강한 프랑스이지만 네덜란드인을 교장
으로, 영국인을 사무국장으로 영입하여 선진디자인의 수용과 교육개혁을
선도하고 있다.

엔시는 학생들이 입학할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엄격한 테스트와 관리를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학교는 기업과 연계된 프로젝트개발을 최종 졸업시험으로 대체하고
있다.

학생들은 해당기업체의 장이 참석하는 졸업시험장에서 자기 작품에 대한
사회적 성격과 역사적 의미, 작품선정을 위한 설문과정, 마케팅 방법,
통계처리 방법, 실용화시의 문제점과 해결방안, 판매전략등을 체계적으로
자신있게 설명해야 한다.

시설면에서 마치 생산공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규모가 크고 다양한 엔시의
실습장에는 디자이너들의 장래 진로에 맞게 중장비와 밀링기계 선반등
대기업을 위한 실습기계들과 소규모의 중소기업용 기자재들이 분리 운영되어
매우 합리적이다.

이 학교의 학생들에게는 졸업때까지 1인당 연간 2만4,000달러가 투자되며
그 예산의 90%는 정부에서, 10%는 기업에서 지원하고 있어 우리와 대조적
이었다.

서유럽의 산업디자인이 전세계 산업디자인 시장을 좌우하고 있는 것은
실기중심의 교육과 기초가 튼튼한데에 연유한다.

현재 우리나라 전문대 이상에서 배출되는 디자이너들은 양적으로 연간
3만여명이 넘지만, 우리 산업디자인의 질적수준은 경쟁국보다 많이 뒤처져
있다.

그렇다고 이에 대한 책임소재를 놓고 정부나 학교 기업이 한가롭게 서로의
잘잘못을 따질 때가 아니다.

이제라도 산.학협동체제를 구축하고 교육개혁을 이루어 능력있는 엘리트
디자이너를 배출하는 데에 더욱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세계시장은 개방되고 산업디자인으로 무장한 외국기업이 현재 물밀듯이
밀려오고 있다.

우리의 산업디자이너들은 이에 대비해 세계화시대에 걸맞는 실력을 배양
해야 하며 구체성을 띠고 보다 적극적으로 대응해 나가야 한다.

산업디자인 분야를 포함해 이제 우리나라의 교육은 개선의 차원이 아니라
혁신의 차원에서 거듭나야 한다.

지금 이 시기를 놓친다면 21세기에 선진국으로의 진입을 기대하는 것은
한낱 공상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5월 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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