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 사후평가를 시대순으로 훑어보면 역사와 진실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충무공은 사후 20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에야 제대로 대접을 받게
된다.

1795년 정조는 이순신의 문집인 "이충무공전서"를 발간했다.

정조는 이때 충무공에게 영의정을 추증하면서 비문까지 손수 지었다.

신하드이 군주가 신하의 비문을 지은 예가 없다고 한사코 말리자
정조가 "나에게 충무공과 같은 신하가 있다면 그 수가 백이리고
모두에게 비문을 지어 주겠다"고 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정조이후 충무공은 사람들의 관심밖으로 밀려나 다시 까맣게 잊혀졌다.

그러다가 일제때인 1931년에 와서야 전국민들에게 알려져 빛을 보게
된다.

당시 충무공의 13대손 이종옥이 조흥은행 본점에 저당잡힌 선산과
위토등이 경매에 부쳐져 충무공의 산소와 사당까지 없어질 위기에
이르렀다.

이것을 "민족의 수치"라고 여겼던 조만식 윤치로 안재홍등이
유족보존회를 조직, 의연금을 거두어 빛을 갚아준뒤 현충사를 짓고
청전 이상범이 영정을 그려 봉안했다.

이광수가 소설 "이순신"을 동아일보에 연재한 것도 이때 였으니,
이 무렵에야 전국민에게 충무공이 제대로 알려졌고 보는 것이
옳은듯 싶다.

그이후 다시 잊혀졌던 충무공은 70년대 유신체제하의 군사정권때
"성웅" 으로 둔갑해 화려하게 되살아났다.

그리고 충무공을 비인간화시켜 성웅시하는 과정에서 많은 지식인들이
충무공에 대한 혐오감을 갖게 되고 80년대에 들어오면 자연스럽게
원균에 대한 옹호론 동정론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원균의 전공을 재평가하는 사학자의 논문, 충무공을 보신책에만 능한
정유재란초래자로 낙인 찍인 인물평전도 나왔다.

또 지난해는 충무공을 비겁한 장수, 원균을 용감한 장수로 미화시킨
소설도 출간됐다.

지난 28일 현충사에서는 오랜만에 대통령이 첨석한가운데 충무공탄신
450주년기념 다례행제와 학술강연회가 열렸다.

이 강연회는 원균옹호론자들에 대한 공식적 비판의 장이 됐다.

한 노사학자는 "왕개미가 큰 나무를 흔들어대니 제 능력 모르고
덤비는 것이 우습기만 하다"는 한유의 시구를 들어 그들을 비판했다.

아무리 역사가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라고 해도 시류에 따라 사실을
왜곡 과장 미화시켜 위인을 만드는 풍토는 하루속히 없애야 겠다는
생각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4월 3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