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 봉숙이 매사에 신경질을 부리며 사은의 식솔들을 못마땅하게
여기자,사은은 결국 장인에게 논밭 판 돈을 내어 놓았다.

"아니,이게 어찌 된 돈인가" 봉숙은 금방 표정이 달라지며 반색을
하였다.

"사실은 논밭이 좀 있어서 팔아가지고 왔습니다. 그동안 장인의 신세진
것만 해도 황공스러운데 또 어떻게 염치없이 계속 신세만 지고 있겠습니까.
그래 이 돈을 맡기오니 저희 식구들이 거처할 집과 경작할 땅을 마련해
주십시오"

"신세는 무슨.자네가 나를 위해 열심히 일한 대가로 자네 식구들이 먹고
살고 있는게 아닌가. 그런 말 말게나. 아무튼 그 돈은 나에게 맡겨두게.
그 돈에 맞게 적당한 집과 땅을 구해 볼테니"

그러면서 봉숙은 사은의 손에서 얼른 돈주머니를 잡아채갔다.

그런데 봉숙은 사은이 건네준 돈의 절반은 떼어놓고 그 절반만으로
허름하기 짝이 없는 초가집과 황무지와 다름없는 땅 몇 마지기를
사서 사은에게 넘겨 주었다.

사은은 장인이 설마 자기를 속이리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그저 요즈음
집값과 땅값이 비싼가보다 그 정도로만 생각했다.

봉씨도 세상물정을 모르기는 매일반이었다.

척박하기 그지없는 땅을 일구어 작물을 내어야하니 사은의 형편은
점점 말이 아니게 되었다.

따로 집과 땅을 얻은지 두 해가 되어갈 무렵,사은은 장인이 자기
욕을 하며 돌아다닌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장인이 자기를 속인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래 저래 낙망이 된 사은이 어떻게 하면 이곳을 떠나버릴까 궁리하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날,사은이 바람이나 쐴까하고 거리로 나갔는데 저쪽에서
도인 한 사람이 걸어오며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언젠가 한번 본 도인과 마찬가지로 그 도인도 봉두난발한 머리로
누더기를 걸친채 다 떨어진 짚신을 끌며 절뚝절뚝 걸어오고 있었다.

그 도인의 노랫소리를 듣자 사은은 마음에 말할 수 없는 갈증이
생기면서 모든 것을 훌훌 떠나고 싶은 충동에 다시금 사로잡혔다.

"좋다. 저 도인을 따라가는 거다"

순간적으로 그렇게 마음을 먹은 사은이 도인에게로 달려가 그가 메고
있는 바랑을 벗겨 자기가 대신 메었다.

도인은 빙긋이 미소를 지으며 사은을 돌아보았다.

"그대, 표표히 떠나가려는가?"

"네, 그러하옵니다. 인생에 아무 미련이 없습니다"

도인이 홱 몸을 돌려 바람처럼 걸어나가자 사은도 급히 그 뒤를
따라갔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4월 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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