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국가를 "빠른 경제권"과 "느린 경제권"으로 나누고
있다.

그는 빠른 경제권 국가와 느린 경제권 국가는 문화적 갈등을 일으키게
되고 교역관계에서도 마찰이 일어날 수 밖에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저속국가의 공무원은 고속국가의 파트너가 시간을 매우 중시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며 또 시간이 왜 그처럼 중요한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속도를 내라는 요구를 불합리하며 오만한 요구라고까지 생각한다는
것이다.

최근 이런 시간문화적 마찰이 한미간에 발생했다.

지난 2월 하순에 들어온 미국산 자몽 세개의 컨테이너(55t)에서 농약이
검출됨에 따라 부산검역소는 위생검역을 강화했고 도착 18일만인 지난
3월9일 검역절차가 끝났을 땐 3분의1가량이 썩어 있었다.

미국은 이런 검역제도가 비관세 무역장벽이라고 판단하고 이의 시정을
요구하면서 마침내 이 문제를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하겠다고 통보해
왔다.

정부는 부랴부랴 부패되기 쉬운 식품에 대해 검역기간을 25일에서 5일로
대폭 단축하는 검역제도개선방안을 마련해서 미국에 통보했지만 일단 WTO
제소라는 날벼락을 맞고 말았다.

한편에서는 "미국은 우리를 봉으로 아느냐" "부당한 압력이다"라는 여론도
나오고 있다.

또한 "과연 미국의 의도는 무엇인가"라는 갖가지 해설까지 나오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를 시간문화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정보화시대의 새로운
갈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고속국가인 미국의 입장에서는 자몽의 위생검사를 하는데 왜 18일이
걸리는지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부패하기 쉬운 식품의 통관검사기간이 왜 25일씩 걸려야 되는지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실제로 미국등 선진국은 수입농산물의 경우 통관 뒤 바로 유통시키고 있고
사후 검사에 의해 문제가 생기면 곧바로 회수(recall)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의 입장에서는 시간이 얼마가 걸리더라도 국민 위생과
관련된 것이라면 철저히 검사하는게 당연한 일이 아니냐고 생각하고 있다.

여기서 바로 속도감각의 충돌이 발생하게 된다.

더구나 미국의 항의를 받고 그동안 25일 걸리던 것을 5일로 단축하겠다니
미국측은 그동안 당해왔다는 배신감을 더욱 느낄 수도 있다.

앨빈 토플러의 경고가 아니더라도 지금 선진국 기업들은 "타임베이스
경쟁", 그리고 "하이스피드경영"을 도입하고 있다.

타임베이스경쟁이나 하이스피드경영의 핵심적 사고는 시간의 가치는 속도와
타이밍이 결정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시간관리의 중심과제가 낭비시간을 줄이고 노동시간을 늘리려는
양적 개념이었다면 이제는 속도를 중심으로한 시간가치의 증대가 중심과제가
되고 있다.

특히 "시간은 소중한 자원"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내 자신의 시간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시간, 즉 고객의 시간가치를 높여주려는 시간관리기술이
각광을 받고있다.

자동응답시스템 24시간무인서비스 대기시간단축 1회방문처리제도 등은
모두 고객의 시간을 고려한 대응책이다.

심지어 영국의 한 항공사는 바쁜 비즈니스맨을 위해서 승객이 투숙한
호텔을 찾아다니면서 휴대용컴퓨터를 이용, 항공권 좌석배정서비스까지
하고 있다.

그러니까 승객은 공항대합실에서 기다릴 필요가 없다.

미국의 일부 은행들은 직원들이 고액예금주들의 사무실이나 가정을 방문
해서 각종 업무를 처리해 주고 있다.

은행에 가서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는 은행이자보다는 시간의 기회비용이
더 커지기 때문에 오히려 손해가 난다고 생각하는 고객들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미국의 파고웰스은행은 고객들이 은행창구에서 5분 이상 기다리게
되면 시간지체보상금을 지급하겠다는 영업방침을 내걸기도 했다.

이쯤되면 "시간은 돈이다"가 아니라 "시간은 돈보다 소중하다"는 개념에
가깝다.

우리는 금전적 손실이나 물질적 손실을 입힌데는 변상을 하지만 시간지체에
대해서는 적당히 사과하고 만다.

그러나 선진국에서는 대부분 시간지체보상금을 물어야 할 정도로 시간지체
에 대해서는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제 "빠른자는 살고 느린자는 죽는다"는 "속도의 경제(Economies of
speed)"논리가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행정혁신도 빠른 서비스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세계화 그리고 국가경쟁력을 외치고 있는 우리나라의 경우 아직도 "속도의
경제"에 대해 둔감한 실정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입을 눈앞에 두고 있으면서도 속도감각은 개발
도상국 수준이라면 선진국과 문화적 마찰이 발생하기 쉽다.

그동안 느린 행정서비스가 국내기업의 발목을 잡는다는 불만이 적지 않더니
마침내 대형무역마찰까지 일으키고 있다.

우리는 지금 수입규모 세계12위 수출규모 세계13위로 규모면에서는 경제
대국이 되었다.

그리고 어느정도 "규모의 경제"는 실현되고 있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그러나 그 거대한 교역량속에는 납기지연 지체행정 시간낭비로 인해서
발생되는 손실이 숨겨져 있다.

이 손실을 제거할수만 있다면 그만큼 부가가치도 높아지고 우리의 경쟁력도
향상될수 있을 것이다.

수입을 아예 안한다면 모르지만 미국농산물 수입은 수입대로 늘어나면서
제소까지 당해야 한다면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이 아닐수 없다.

미국측의 부당한 통상압력에는 당당하게 대응해야겠지만 차제에 우리나라
에도 "하이스피드행정"이 확산되기를 기대해 본다.

세계화를 추진하기 위한 행정서비스는 친절봉사보다도 "속도의 경제"에서
찾아야 할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4월 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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