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세계가 지구촌화의 물결에 휩쓸리고 있다. 전자혁명이 가져온 필연적
결과다.

국제화 또는 세계화는 이에 적응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해석될수 있을
것이다. 이런 조류속에서 언론인들이 떠맡고 있는 역할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은 분명하다.

특히 지구촌 구석구석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언론인들이 싫든좋든
변화물결의 주체가 되어 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지난 30년간 무려 150여명의 국내 언론인들을 미.일.
영.불등 해외 유수대학에 연수시켜온 성곡언론재단이야말로 우리사회
의 소리없는 구제화첨병이자 실질적인 후원자였다고 할수 있다.

성곡언론재단의 한종우이사장(63)을 그의 집무실에서 만나 보았다.

-성곡언론재단이 올해로 30주년을 맞는 것으로 아는데.

<> 한이사장 =그렇습니다. 이 재단의 창립자인 성곡 김성곤선생이
재단을 창립한 것이 1965년이었으니까 오는 9월13일로 꼭 30주년이
됩니다.

-여러가지 행사가 많으리라 여겨집니다.

<> 한이사장 =바쁜 한해가 될 것같습니다. 기념세미나도 열고 그간
이 재단의 가족이 된 성곡 펠로우들을 용평에 부부동반으로 초청하여
축하연도 열 계획입니다.

-대표적인 성곡 펠로우 몇분을 소개한다면.

<> 한이사장 =86년 작고하신 조선일보의 선우휘선생(도쿄대 유학),현재
수원대학 정경대학장으로 계신 박현태씨(도쿄대 유학),그리고 동아일보
이사로 계신 정연권씨(미컬럼비아대 유학)가 우리 성곡재단 1기생입니다.

그 뒤를 이은 분들로는 전 통일원장관을 지낸 최영철씨(3기) 현
내무장관인 김용태씨(9기.니만펠로우) 공보처장관인 오인환씨(3기)와
국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종하(6기)조순환(3기) 강인섭(10기)씨,
언론계의 손주환서울신문사장,이인형부산매일신문사장 그리고 현승일
국민대총장(11기)등이 있습니다.

-지난해 11월에는 미 미주리대학으로부터 "세계언론공로상"도 수상하신
것으로 아는데.

<> 한이사장 =잘 알려진대로 미 미주리대는 언론학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권위있는 대학입니다.

이 대학이 성곡재단의 과거 30년에 걸친 언론부문에서의 공헌을 인정해
주었다는 것은 우리 재단의 영광이자 언론계의 경사라고 생각합니다.

이 자리에서는 미국 ABCTV의 백악관 출입기자 샘 도널슨과 텍사스출신의
여류 컬럼니스트인 몰리 아이빈스등도 함께 받았지만 신문기자나 신문사가
아닌 미국이외의 단체가 공로상을 수상한 것은 성곡재단이 처음입니다.

이 수상식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이 성곡재단의 소리없는 역사가 이미
30년이라는 족적을 남겼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하더군요.

아울러 미주리대학은 새 언론학 건물을 준공했는데 그중 한 회의실을
"성곡 컨퍼런스 룸"으로 명명하기까지 했습니다.

-수상식에서 에피소드는 없었습니까.

<> 한이사장 =나는 50년대에 미주리주와 인접해 있는 캔자스 주립대에서
경제학석사를 했습니다.

어느 대학이나 마찬가지지만 숙적관계가 있게 마련인데 캔자스와
미주리는 농구 축구등 모든 운동경기뿐 아니라 학문적인데서도 라이벌
관계가 있습니다.

캔자스출신인 내가 미주리에 선 것은 적진 한가운데 선 격이었지요.

수상소감을 밝히는 자리에서 "캔자스출신이 미주리대의 상을 받는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수 없는 일로 여겨왔다"고 했더니 모든 청중이 배를
잡고 웃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경제학전공과 언론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 한이사장 =국내에서 영문학을 하고 미국에 건너가 경제학을 마치고
돌아오자 개인적인 관계가 있던 성곡선생이 불러 당시 쌍용그룹이
소유하고 있던 동양통신에서 일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동기가 됐습니다.

처음에는 외신부와 UPI서울지국에서 6개월간 수습을 받은후 일본특파원
으로 파견돼 도쿄에서 15년을 주재했습니다. 해외특파원 주재기간으로는
기록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15년동안 크고 작은 사건을 다 경험하셨으리라 여겨집니다.

<> 한이사장 =일본에서 주재하던 기간이 60년에서 75년까지였으니까
그 사이에 발생한 사건들은 모조리 경험했다고 할수 있죠. 특히 일본인
들의 시각은 어떤 것인가하는 관점에서 바라볼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5.16은 물론 65년의 한.일국교정상화,그리고 도쿄올림픽까지 모두 큰
사건들이었습니다.

당시 이케다총리의 소득배가운동으로 일본은 고도성장기를 구가하고
있었고 이런 경제부흥기에 일본에서 일할수 있었다는 것은 큰 경험
이었습니다.

-영자지 코리아 헤럴드사장도 지내신 것으로 아는데.

<> 한이사장 =헤럴드에서의 사장재임기간도 8년이나 됐으니까 이
부분도 장수기록으로 남을지 모릅니다.

-국제화 물결속에서 영자지의 중요성도 무시할수 없는데.

<> 한이사장 =지구촌시대에 영자지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자지에 광고를 내려는 소비자 광고주들이 아직 많지 않은
점은 커다란 숙제로 남아있습니다.

일본의 재팬 타임스같은 영자지는 이미 자체 수익으로 운영될수 있는
정도의 수준에 올라 있지만 우리나라는 아직 그런 수준에 가있지 못해
안타깝습니다.

-80년 언론통폐합당시 동양통신 전무로 계셨는데 동양통신과 합동통신이
합쳐져 연합통신이 되는 과정에 진통은 없었습니까.

<> 한이사장 =이제 지나간 과거는 과거에 묻어야할 시간입니다.

일부에서는 다시 분리시켜 독립적으로 운영돼야 한다는 소리도 있지만
이미 연합통신은 KBS와 MBC가 대주주가 되어 운영하고 있는 마당이기
때문에 역사의 바퀴를 되돌려 원위치시킨다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현실을 현실로 받아 들일줄 아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요즈음 언론에 대한 평가는 어떻게 하고 계십니까.

<> 한이사장 =60년대에는 외화가 태부족한 시기였습니다.

이런 상황속에서도 성곡 선생이 언론인들의 해외연수를 강조하신
것은 우리나라 기자들이 조노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당시만해도 신문들이 조석간을 내던 때니까 격무에 시달리다 보면
기자들이 자기계발을 할 기회를 찾지 못했습니다.

무한경쟁시대라는 요즈음이 바로 그때 그 모습을 재연시키고 있는
것같아 안타깝습니다.

다시말해 기자들이 자기 스스로를 되돌아 볼수 있는 여유를 찾지
못하고 하루하루의 일과에 쫓겨 정신없이 돌아가야 하는 것이 기자
스스로는 물론 그가 소속한 신문,그리고 독자인 국민들에게도 큰
손해요 낭패가 아닐수 없습니다.

-다소 부정적인 평가를 하시는 것같군요.

<> 한이사장 =그렇다고 언론 자체를 폄훼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나 할까요. 문민정부 출범이후 우리 언론은
황금기를 맞았다고 봅니다.

정부가 여론을 중시한 당연한 결과라고 봅니다.

자유언론은 그 무엇과도 바꿀수 없고 그런 의미에선 문민정부의
치적 1호로 꼽힐만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언론사간의 경쟁이 극한 상황에 달해 여러가지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고 봅니다.

그 중에서도 무모한 증면은 큰 문제가 아닐수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양위주에서 질위주로 바뀌어야 하고,정말 최고급 신문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보여줘야 합니다.

유가부수에 대한 보다 공정한 평가를 받을수 있는 ABC시스템 도입도
시급하고요.

다루는 주제도 국내정치등 지엽적인 문제에서 벗어나 환경 국제분쟁을
위시하여 기아에 허덕이는 지구촌 사람들을 돌아 볼수 있는 여유도
가져야할 때라고 봅니다.

국제화란 이런 문제들에 대한 보다 많은 관심의 표현으로부터 시작
돼야 할 것입니다.

-요즈음 기자들은 과거의 기자들과 여러가지 면에서 다르다고들
합니다. 대학을 졸업하는 학생들이 기자가 되기위해 기자고시를
본다고 할 정도죠. 후배기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 한이사장 =잘 알려진 말이지만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했습니다. 능력이 있을수록 자만하지 말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세를
보여줘야 합니다.

<대담=양봉진 증권부장>

(한국경제신문 1995년 4월 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