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병수 조흥은 외화재무팀장>

국내외의 환율동향이 경제지뿐만 아니라 종합지의 1면 톱기사로
자주 게재되었던 지난 한달간은 국내 금융사상 유예없던 기간이었다.

이미 시작된 격변기에 국제금융시장에서 발생했던 일련의 사실들을
살펴 봄으로써 대리경험의 효과를 기대하는 것도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60년대 후반 독일 일본 스위스등은 쌓이기만하는 국제수지흑자의
지속되는 경제성장때문에 자국화폐의 평가절상을 피할수 없게 된
반면,미국 프랑스 영국등 대다수 국가들은 자국화폐의 평가절하
여건에 속수무책이 되어 고정환율제는 무너지고,71년12월 워싱톤에서
체결된 스미소니안 협정에 의거 변동환율제가 시행되었다.

73년 석유파동때 배럴당 9달러 수준에서 단기간에 36달러 수준까지
폭등한 원유 신용장의 결제통화였던 달러 수요의 급증으로 달러의
엔 및 마르크화에 대한 환율은 3개월만에 10% 강세로 반전했다.

대량의 미국자본이 산유국으로 이동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74년1월
미국이 달러 표시 자본의 유출입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자 달러는
다시 약세기조로 바뀌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는 최초의 외환사고가 발생한다.

60년대 후반 3%선의 이자율이 7% 이상으로 상승하는 국면에서 고정금리인
미국 재정채권을 주요자산으로 운용했던 뉴욕주 롱 아일랠드 소재
프랭클린 내셔널 뱅크는 금리예측의 잘못으로 입게된 손실을 외국환매매에서
보상 받고자 마르크를 팔고 달러를 매입한 환투기 거래를 감행한
결과233백만달러의 외환매매손을 입고 74년10월 파산했다.

이 은행은 52년 최초의 은행신용카드 발급은행이었으며,전성기에는
세계 100대 은행이기도 했다.

같은 시기에 독인 Herstatt Bank 도 환투기로 450백만달러의 손실을
입어 외환사고에 의한 세계최초의 파산은행이 되었으며,이후 80년대를
95년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외환사고는 끊이지 않았다.

자유화가 완전히 이루어진 외환시장,주식시장,그리고 장단기 금융시장하에
서는 기관투자가와 투기거래자들이 약세통화를 처분하여 강세통화나
고금리 통화로 운용하려는 노력을 계속하는 과정에서 재정( arbitrage
)거래가 끊임없이 지속되기 때문에 외환시장을 독립적으로 분석하여
환율동향을 예측할수 없다.

과거의 경험으로 볼때 70년대와 80년대 중반까지는 GNP,무역수지,경기선행
지수등에 근거한 경기예측기법의 효과가 높았고,80년대 중반이후는
통화당국의 개입의지와 주요인사들의 발언이 환율과 금리 변동에
결정적 영향을 주곤했다.

그러나 최근에 이르러 수많은 Hadge Fund )들과 투기거래자들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G-7의 공동노력까지도 무력화시키는 사태가 빈발함에
따라 독일의 중앙은행이 행사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재할인금리
조정도 단 하루를 못넘기고 약효가 떨어지는 현실속에서 일본 중앙은행의
고민은 더욱 커질수 밖에 없다.

일본의 재할인금리 인하가 엔의 강세기조를 중장기적으로 반전시키지
못할 요인이 다분함에 따라 그 다음 동원할 수단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일본 엔화가 강세로 갈 확율이 높은 이유는 이렇다.

85년초부터 87년말까지 엔화가 거의 직선적 강세현상을 보일때 일본
당국과 산업계에서는 200엔이 무너지면 일본경제가 침몰할 것이라고
비명을 지리기 시작했다.

이후 128엔에 이르기까지 매번 10엔 단위가 돌파될 때마다.

더 큰 엄살을 부렸음에도 일본 경제는

(한국경제신문 1995년 4월 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