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은 한국근대사법의 100주년을 맞이하는 뜻깊은 달이다. 1895년 4월1일
에 법률 제1호로 재판소구성법이 제정됐으며 25일부터 한성재판소설립등의
실제적인 사법활동시행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그동안 왕권에 통합되어있던 사법권이 사법부에 의해 독립적
으로 활동을 개시하게 된 것이다.

이는 기존의 행정과 사법이 미분된 이른바 ''원님재판''시대가 막을 고하고
판사와 검사 변호사가 역할을 분담하는 근대사법시대의 막이 열리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당시 구한말 개혁의 바람과 함께 사법부가 탄생했듯이 오늘날에는
사법부의 거듭남을 기대하는 사법개혁의 움직임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우리나라 법조계의 산증인이라고 할수 있는 이홍규
변호사(91)를 만나보았다.

충남 예산출신의 이변호사는 일제시대인 1943년에 법조계에 뛰어든
이래 서울지검 고검, 대검검사등 20여년의 검사생활을 마치고 65년에
정년퇴임하여 현재까지 변호사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이변호사는 ''대쪽판사'' 이회창전총리의 부친으로서 그 역시 검사재임시
''대쪽검사''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원리원칙주의자로 유명했다.

이변호사와 첫대면을 했을때 아흔을 넘기고도 정정한 모습에 그의
장수비결이 우선 더 궁금했다.

-여태까지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 이변호사 =뭐, 특별한게 있나요. 우리 집안이 장수하는 편이죠.
(우리나라 자연과학계의 태두로서 노벨상 후보자 명단에 까지 올랐던
이변호사의 형인 이태규박사도 90세의 일기로 92년 10월에 작고하였다)
굳이 있다면 규칙적인 생활에다 꾸준히 일을 하는 것이지요.

일에 몰두하다보면 건강은 자연히 뒤따르게 마련입니다. (이변호사는
지금도 평화합동법률사무소의 대표변호사로서 일을하고 있을 뿐만아니라
한달에 2~3번은 직접 법정에 서기도 한다)

-하루생활은 어떻게 하고 계시는지요.

<> 이변호사 =새벽4시에 일어나 (혜화)성당에서 미사를 보는 것으로
하루가 시작됩니다.

9시까지 사무실(을지로 2가)에 출근하여 일을보고 잠깐 집(서울 종로구
명륜동 2가 75)에 가서 점심을 한후 다시 사무실에 나왔다가 5시반에
퇴근하지요.

그리고 정년퇴직후 환갑때부터 시작한 철봉운동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는데 요즘도 철봉타고 돌기를 하루에 20회정도하며 간간이 바벨
들어올리기도 합니다.

-가톨릭신자가 된 특별한 동기나 배경이 있습니까.

<> 이변호사 =서울지검재직시 현직검사로서는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구속됐다가 무혐의로 풀려난뒤 심적인 갈등을 겪고 있을때 윤형중신부가
찾아와 위로해준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지요.

51년 부산 중앙성당에서 장병룡신부로부터 세례(세례명 요셉)를 받았는데
그때 대부가 장면선생이었습니다.

이후 적극적으로 주위사람에게도 가톨릭신앙을 권유하게 되었는데
김홍섭판사(세례명 바오로)는 나의 대자입니다.

-그때 무슨 사유로 구속되셨는가요.

<> 이변호사 =50년 6.25가 나기 직전에 경찰이 남노당원이라고 구속한
사람을 수사해봤더니 사실과 달라 풀어줬다가 혐의를 받게된 것이지요.
내가 그들과 내통한다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사실은 내가 평소 상부의 지시에 고분고분하지 않아 고위층의
눈밖에 난데다 일부 동료 검사들의 시샘이 겹쳤기 때문이었던것 같습니다.

-고위층의 눈밖에 난 일들은 어떤게 있었습니까.

<> 이변호사 =광주지검에 근무할때 땅부자였던 한민당 전남지부장의
세무비리 뇌물공여사실을 적발하자 윗사람이 잘봐주라는 압력을
가해왔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구속기소한 일이 있었지요.

그리고 이때문에 청주지검으로 좌천됐는데 여기서도 또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윤모 충북도지사가 국민에게 나눠줘야할 미국의 구호물자를 빼돌린
사실을 알아내고 구속한 당일 즉시 기소해버렸지요.

그런데 이 양반이 바로 이승만대통령과 가까운 사람이었거든요. 이 일로
인해 당시 이인법무장관이 이대통령에게 불려가 단단히 꾸지람을 받았지요.

나는 이장관으로부터 호출을 받고 서울에 가서 검찰간부들이 모여있는
가운데 사건의 경위를 설명하는 곤욕을 치렀습니다.

이때 "이런 사건조차 구속기소하지 못하면 검사직을 그만두겠다"며
울분을 터뜨렸습니다.

-윗사람들이 볼땐 참으로 다루기 힘든 존재였겠습니다. 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으면 하나 들려주시죠.

<> 이변호사 =4.19혁명직후 법무부 형정국장직을 맡고 있을때입니다.
당시 조재천법무장관집에 마포형무소에서 죄수들이 수확한 배추와 무를
갖다주면서 김장에 사용하라고 했던 모양입니다.

조장관은 형정국장으로 있던 깐깐한 나의 성격이 마음에 걸렸던지
부하인 내게 전화를 걸어왔더군요. 그 배추를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느냐는 것이었지요.

그래 그랬지요.

"걱정하실것 없습니다. 내일 아침에 시장에가서 김장시세를 알아보고
그 값만큼 계산해서 갚아드리면 되겠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지나치게 원리원칙에 따르다보면 인간적인 사랑이나 너그러움이
발붙일수 없지 않을까요.

<> 이변호사 =하긴 그런 면도 있더군요. 한번은 김홍섭판사가 이북에서
남한에 내려와 간첩활동을 하다가 붙잡힌 사람을 재판할때 나는 원칙대로
사형을 구형했죠. 그런데도 김판사는 겨우 15년을 판결하는 거에요.

재판후에 내가 못마땅해서 따지듯이 "김판사 그럴수가 있느냐"고 그랬더니
"죄송합니다"는 말만 하면서 빙그레 웃기만 하더군요.

나중에 김판사는 이 사람을 직접 찾아가 신앙심을 심어주는등 그를 다시
일어나게 하는 모습을 보고 느낀바가 컸습니다.

그분의 재판은 사랑의 재판이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검사로서는 정의를 구현하는데 앞장서야된다는 입장에서 원리
원칙을 고수해야 된다는 원칙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정의와
사랑이 서로 보완관계를 유지할 필요는 있다고 봅니다.

-지난해 12월10일 제46회 세계인권선언기념식에서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으신 것은 못가진자와 억울한자의 입장에서 무료변론을 해주기도 하고
특히 인권침해사건변론에 기여한 공로가 컸기 때문이었지요.

<> 이변호사 =지난 50년 내가 구속됐을때 인권침해의 실상을 직접
체험해 보았습니다.

끌려가자마자 동료검사는 내가 남로당원이라는 사실을 자백하라며
구타는 물론 전기고문에다 물고문 잠안재우기등 4주동안 온갖 고통을
다 주었습니다.

결국에 가서는 혐의점을 찾지 못해 풀려나긴 했지만 그 때의 비인격적인
수모는 잊을수가 없습니다.

그 이후 억울하게 인권이 침해당하고 가지지 못한 자가 법률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 인권변호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지요.

-인권침해에 대한 부작용도 문제지만 최근 각종 강력사건들이 빈발하면서
강력한 법집행과 함께 가정교육의 중요성이 새삼 강조되고 있습니다.
자녀들에 대한 교육은 어떤 식으로 하셨습니까.

<> 이변호사 =솔선수범을 보이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자식들에 대해
말로써 가르치려고 하기 보다 항상 내주변을 깨끗이 해두고 부모가 실제
모범행동을 보인다면 저절로 따라올것 아닙니까.

다만 나는 기회있을때 마다 "정의롭게 살아야된다" "정의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내놓아도 좋다"는 말을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꼭 할일이다 싶으면
반드시 밀어붙여라"고 강조했지요.

-자녀들은 어떻게 됩니까.

<> 이변호사 =4남1녀입니다. (부인 김사순여사와 32년에 결혼하여
회정 회영(여) 회창 회성 회경씨를 두었다.

1남 회정씨는 서울대의대출신 의학박사로 미국 브라운대학 마운트사이나이
대학에서 병리학을 연구하였으며 최근 귀국하여 삼성의료원에서 근무중이다.

2남 회창씨는 전총리이고, 3남 회성씨는 서울대상대를 졸업한후 미국
뉴저지대학에서 자원경제학박사를 취득하였으며 한때 엑슨석유회사에
근무하다가 귀국해 현재 통상산업부 산하 에너지경제연구원원장으로
재직중이다.

4남 회경씨는 뉴욕주립대에서 계량경제학분야의 박사학위를 취득하여
대전 과학기술대에서 교수직을 맡고 있다)

-경력을 보니까 한때 대한통운에서 이사직을 맡은 것으로 되어있던데요.

<> 이변호사 =변호사업을 하면서 그 기업의 법률고문직을 겸했던 것이지
기업본연의 일을 했던 것은 아닙니다.

-법조계 후배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은.

<> 이변호사 =잘 하고 있는데 특별히 할말은 없습니다.

다만 수사대상이 고위층일수록 압력이 거세어질수밖에 없는데 끝까지
버티면서 파고들어가고 사심없이 법에 따라 처리하는 기개를 가져달라는
당부를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부정과 비리는 국민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감사 수사기관이
제몫을 다하지 못해 일어나는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될 것입니다.

<대담 =김대곤뉴스속보부장>

(한국경제신문 1995년 4월 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