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연 서울신탁은행 청파동지점장.

그는 요즘 컴퓨터와 공작기계에 관한 공부를 많이 한다.

단순히 컴퓨터시대를 살아가려는 목적에서가 아니다.

평소에 컴퓨터나 기계산업에 특별한 관심이 있었던 것은 더욱 아니다.

대학에선 법학을 전공했고 은행에 들어와선 숫자에 파뭍혀 살았다.

그런 김지점장이 때늦게 이런 공부를 시작한 것은 3개월전부터.

청파동지점장으로 발령받은게 계기가 됐다.

서울신탁은행청파동지점은 남영전철역 바로 위쪽에 있다.

큰길 양옆에 즐비하게 들어서 있는게 중소공작기계업체들이다.

벌써 아득한 옛날이긴 하지만 한때 공작기계제작의 메카로 명성을 날리던
바로 그 지역이다.

원효대교쪽으로 이들 업체에 잇달아 있는 업체는 컴퓨터전산업체들.

용산전자상가를 비롯해 전자산업의 중심지로 급부상하고 있는 지역이다.

청파동지점의 거래업체들이 주로 이들 업체임은 당연하다.

공작기계와 전자산업이 김지점장의 전공과목이 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실제 그는 하루 일과를 기업체에서 시작한다.

그가 은행에 도착하는 시간은 오전8시 전후.

그러나 곧장 점포안으로 들어가는 일은 거의 없다.

30-40분동안 주위 업체를 돌아본다.

새로 개소한 업체는 없는지, 문을 닫은 업체는 없는지, 개점휴업상태인
업체는 없는지등을 살펴보기 위해서다.

처음엔 익숙치 않았지만 이젠 척보면 뭐가 달라졌는지를 알수 있을 정도가
됐다고 한다.

오전 9시30분.

은행문을 열면 김지점장은 직접 첫손님을 맞는다.

고객만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다짐을 다지기 위해서다.

그 다음은 결재시간.

이 때가 기계와 컴퓨터공부진도를 평가받는 첫번째 과정이다.

여신결재같은 경우 자금수요 자금수급상황등을 알아보려면 반드시 기초
상식이 필수적이다.

그 시간이후 김지점장은 다시 현장에 있다.

주위의 2백-3백여개의 업체를 순차적으로 방문하는 것이다.

이 곳이 공부정도를 두번째로 평가받는 장소다.

전문용어나 시장상황등을 모르면 말도 붙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아울러 업체직원들의 애경사등을 미리 파악하는 것은 사전상식에 속한다.

김지점장은 그러나 거래업체에서 절대 "예금권유"를 먼저 꺼내지 않는걸
불문율로 삼고 있다.

괜히 부담을 주면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는 경험에서다.

세상돌아가는 이야기, 가뭄이야기, 경기얘기등 이것저것을 얘기하다보면
자연스레 돈이야기도 나온다.

그러다보면 업체쪽에서 먼저 예금이야기를 꺼낸다.

팔자에 없는 공부가 성과를 나타내는 순간이다.

그러나 업체들이 무조건 예금을 자원할리는 만무하다.

중소기업체의 성격상 언제나 돈부족타령이다.

당좌대출한도를 늘려달라든지, 상업어음할인을 확대해달라든지, 아니면
직접 대출을 해달라든지등.

기업체가 생기면서 있었던 문제라고 하지만 요즘은 이들의 요구를 가볍게
무시하는게 쉽지 않은 상황이다.

후발은행등이 대거 이 지역에 점포를 내면서 경쟁도 치열해졌다.

좀 괜찮다싶은 기업에겐 먼저 대출을 제안한다.

당좌대출한도확대는 물론 상업어음할인 직접대출등을 즉석에서 승인하기도
한다.

한정된 대출자원을 효율적으로 분배하지 않는한 거래업체를 늘리기는 힘든
상황이란걸 김지점장은 하루에도 몇번씩 절감한다.

직전에 근무하던 지점은 그렇지 않았다.

80%이상이 가계고객인 특성상 그곳 고객들은 예금금리에 민감했었다.

얼마나 높은 금리를 제공하느냐가 고객유치의 관건이었다.

이곳은 아니다.

거래조건으로 대출규모확대는 물론 대출금리인하를 공공연히 요구하는
판국이다.

고민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10여개의 중견기업들은 아예 김지점장을 오라가라한다.

하는 말도 노골적이다.

"A은행에선 이런 조건으로 대출해 준다고 한다"라든가 "B은행에선 대출
한도를 이만큼 늘려준다고 한다"는 식이다.

그렇다고 무리한 대출을 선뜻선뜻 승인할수는 없는 노릇이다.

요즘같이 부도설이 횡행하는 상황에선 더욱 그렇다.

정확한 심사와 빠른 판단이 어느때보다 중요하다는게 김지점장의 판단이다.

그래서 "업체의 요구를 가능한 수용하되 심사는 철저히"가 대출전쟁시대를
살아가는 김지점장이 모토가 됐다.

이런 덕에 아직까지 할인해준 소규모 어음이라도 문제가된 경우는 없다.

오히려 예금계수등 각종 실적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김지점장같은 은행지배인이 현재 약6천여명 있다.

한 때는 "소행장"으로 대접받던 사람들이다.

그런 그들이 지금은 "기업우위시대"를 실감하면서 전국을 누비고 있다.

기업체의 대출요구를 수용하되 사고율제로를 실현해야 한다는 이율배반적인
고민을 안고서 말이다.

<하영춘기자>

(한국경제신문 1995년 3월 2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