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자경LG그룹 명예회장이 22일로 경영일선에서 물러난지 한달째를 맞는다.

재계에 첫 "무고승계"라는 이정표를 세운 그는 요즘 회사에 가끔 출근
하면서도 그룹업무에 대해선 일체 간여를 않고 있다.

얼마전 이문호회장실 사장이 문안인사겸 업무보고를 하자 "내게 들를
시간이 있으면 회장을 더 잘 보필하라"며 물리쳤다고 한다.

지난 20일 서울 인터콘티넨털 호텔에서 열린 구본무신임회장의 취임축하연
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작년 고희연때 "요즘 나는 우리 회사가 15년뒤 세계 최고의 초우량기업으로
성장해 있는 꿈을 자주 꾸곤 한다"며 "혁신"과 "초우량"을 강조했던 그가
요즘 꾸고 있는 꿈은 무엇일까.

본사 유화선산업1부장과 이학영기자가 그를 서울 여의도 LG트윈타워빌딩
동관 32층에 새로 마련된 명예회장실에서 만나봤다.

< 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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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담 = 유화선 < 산업1부장 > ]]]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구명예회장=마음내키는 대로지요. 운동(골프)도 하고, 농장(충남 성환)도
가고요.


-그래도 바삐 움직이신다면서요. 신임회장의 말을 빌리면 "사람은 나이
들수록 친구가 취미가 있어야겠더라"며 회장께서 현역시절 못지않게
바쁘시다고 하더군요.

<>구명예회장=옛날보다 더 바쁠수야 있겠습니까. 다만 이전과 다름없는
생활리듬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거지요.

그래서 회사에도 일주일에 한 두어번 나오고 있지요.


-회사에선 어떤 일을 하십니까.

<>구명예회장=학원사업과 문화재단 복지사업을 챙기고 있습니다.(구
명예회장은 경영은퇴뒤에도 LG연암학원 LG연암문화재단 LG연암복지재단등
3개의 법인이사장 직함은 그대로 갖고 있다. 퇴임 한달째를 맞는 22일엔
복지재단이 출연한 서울 은평구 사회복지관 준공식에 참석할 예정이다.)

그룹업무는 전혀 모르고요. 보고도 받지 않습니다.


-부모입장에서 보면 자식은 아무리 늙어도 길조심을 당부하게 마련
아닙니까.

시어머니는 나이가 들어도 곳간 열쇠를 며느리에게 넘기지 않는 법이고요.
신임회장이 잘 하고는 있다지만...

<>구명예회장=우리 집안엔 때가 되면 물러나는 전통이 확립돼 있습니다.
조부께선 회갑이 되시자 모든 집안재산과 땅문서를 아버지께 물려
주셨습니다.

할머니께서도 회갑때 곳간 열쇠를 어머니께 넘겨주셨지요. 그래서 나도
은퇴시기를 언제로 잡을까 생각하다 71세(만 70세)로 정했던 것입니다.

요즘은 평균 수명이 그때에 비해 많이 길어졌으니까요.


-후임회장께 넘겨주시면서 아쉬웠던 점은 없었습니까. 회장 이.취임식땐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시는 모습도 보이시던데요.

<>구회장=나는 지난 70년 선친이 너무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미처
준비도 안된 상태에서 45세의 젊은 나이에 그룹회장 자리에 앉았거든요.

그때 고생했던 온갖 기억이 머리를 스쳐갔죠. 한편으로는 내가 자식에게
너무 일찍 자리를 물려줘 고생시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주말이면 성환 농장에 내려가 난초를 벗삼은 것도 그 때부터입니까.

<>구명예회장=회장을 맡고나서 고독한 생활을 하다보니 난초를 친구처럼
대하게 됐지요.

길러보니까 난초와 대화도 되는 것 같고. 청초하고 우아한 자태를 보는
즐거움은 직접 길러보지 않고는 모를 겁니다.


-동양란만 한 1백종 기르신다는데 난초철학도 생기셨겠네요.

<>구명예회장=철학까진 모르고요. 굳이 난초가 주는 교훈을 말한다면
"삶에 있어 언제나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함이 없는 사랑으로, 겸손하고
부지런하게 온갖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사람들은 LG그룹을 평해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기업"이라고들 하지요.

그러나 회장께선 지난 7년동안 "혁신"을 무척 강조하셨고, 또 그 방향으로
한국 재계를 이끄시기도 했습니다.

<>구명예회장="혁신"의 목표는 "초우량 기업"입니다. 양이 아니라 질적으로
말입니다.

그렇게 되자면 고객을 위한 가치창조를 염두에 둬야 하고, 고객을 만족
시키려면 연구개발 서비스등에서 또 혁신을 해야 하고.

그래서 "고객을 위한 가치창조"와 "인간존중의 경영"을 새로운 경영이념
으로 내걸었던 것입니다.


-회장께선 스스로를 "고객에 미친 영감"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지요.
요즘은 유행어가 되다시피 했지만 사실 "고객만족"이란 용어는 회장께서
처음 쓰고 개념도 정립하신 걸로 알고있습니다만.

<>구명예회장=고객만족이란 한마디로 "고객을 위한 가치창조"를 뜻합니다.


-"자율경영"도 LG그룹이 처음 선보인 용어 아닙니까.

<>구명예회장=그렇습니다. 자율경영은 말 그대로 경영의사 결정권을 각
경영자들에게 일임한다는 뜻입니다.

물론 책임도 뒤따르는 것입니다만. 1년에 한번 그룹회장단과 CU(사업문화
단위=소그룹)장들이 컨센서스 미팅을 갖는데 여기에서 1년간 이뤄야 할
주요 경영정책사안을 합의합니다.

그외 모든 권한은 CU장들에게 위임되지요. 그렇다고 CU장이 모든 권한을
행사하는 것도 아닙니다.

CU장은 또 나름대로 아랫사람들과 컨센서스를 형성해 권한을 이양하고
있지요.


-연구개발엔 어떻게 신경을 쓰셨습니까.

<>구명예회장=시간만 나면 연구원들을 만나 격려해 주려고 노력했습니다.
술도 꽤 사줬고요.

사장단과는 1년에 한두번 골프치는게 고작이었지만 연구소장들과는 거의
한달에 한번은 필드를 돌았지요.

일반 회사와 달리 연구소는 임원 티오(T.O.)를 따로 정해놓지 않고
있습니다.

누구든 능력만 있으면 임원대우를 해주지요.


-회장께선 경영능력이 그렇게 탁월하면서도 너무 한 우물만을 고집했다는
지적도 없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혹시 지금 이 시점에서 되돌아 보기에 아쉬운 것은 없습니까. 이러이러한
사업은 진출했어야 했는데 하면서 말입니다.

<>구명예회장=그런 것 없습니다. 자동차나 조선산업같은 걸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무엇때문에 그런 업종에 뛰어들어야 하는지 저는 이해가 안갑니다. 국내가
아니라 국제적으로 경쟁할 수 있는 기업이 돼야 한다는게 제 경영소신
입니다.

예를 들어서 그룹 주력업종인 전자산업만 놓고 봐도 반도체 LCD(액정표시
장치)등 세계시장을 놓고 진출할 분야가 얼마든지 널려있지 않습니까.

국내에 시장기회가 좀 엿보인다고 해서 아웅다웅하는 것보다는 처음부터
세계시장을 무대로 해외대기업들과 경쟁한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도 LG그룹은 독특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70.80년대 정부가
"잘 살아보세"라고 할 때 LG는 "바르게 살자"고 했고, "안되면 되게 하라"고
외칠 때는 "될 일만 되게 하라"는 식으로 대응했다면서요.

<>구명예회장=사실입니다. 68년인가, 방위산업 붐이 일 때입니다. 그때
정부관계자가 치약 칫솔사업을 집어치우고 탱크를 만들라고 권유했습니다.

하지만 우린 사양했습니다. 치약과 칫솔은 시장이 다 확보돼 있는데 이걸
그만두고 왜 탱크를 만드는데 뛰어듭니까.

그래서 "협력은 하겠는데 기존 사업을 치우고는 못하겠다"고 정중히
말한 적이 있지요.


-요즘 붐을 이루는 대북경협은 어떻습니까.

<>구명예회장=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큰 걸 노리고
뛰어들어선 곤란합니다.

지금은 탐색전에 열중할 때 입니다. 상대방을 이해시키면서.


-전경련을 맡아 이끄실 때라고 기억합니다만 군사정권 시절인 그때도
회장께선 직언을 서슴지 않으셨죠.

문민정부의 경제정책은 괜찮은 편입니까.

<>구명예회장=옛날 이야긴 하고 싶지 않고요. 최근들어 정부는 대기업들에
선단식 경영을 탈피하라고 하는데 마치 2차대전 직후 맥아더군정이 일본
재벌을 해체할 때와 같지 않은가 하는 느낌입니다.

정부가 노무 조급한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지금은 그야말로 세계화
시대 아닙니까.

세계적으로 경쟁할 수 있는 기업을 키워야지요. 이젠 정부의 정책도
국내위주의 발상에서 과감히 벗어나 세계지향적으로 가야죠.

골치아픈 얘기는 이제 그만 합시다.

<<< 계 속 ... >>>

(한국경제신문 1995년 3월 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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