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그 경환 선녀는 어디로 가는 길이랍디까?"

"서로 몹시 사랑하지만 맺어지지가 않아서 안타까워 하고 있는 남녀
들이 있길래 그들에게 상사의 회포를 풀어줄 기회를 주려고 세상으로
내려가던 중이라 하더군"

"세상에는 그런 남녀들이 많은 모양이죠?"

습인은 얼굴을 살짝 붉히며 물었다.

보옥과 자기도 결코 맺어질 수 없는 관계가 아닌가.

"그런 모양이야. 그래서 남자고 여자고 상사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가 죽기도 한다더군. 이 세상에서 사랑이라는 병만큼 무섭고
심각한 병도 없는 모양이야. 그래서 경환 선녀가 그런 노래를 불렀던
거지"

"어떤 노래요?"

"벌써 잊어먹었나? 산너머에서 들려오던 그 노랫소리 말이야"

"아, 그거요? 봄꿈은 구름따라 흩어지고. 했다는 노래 말이죠?"

"그래. 그 구절 다음은 이렇게 이어지지. 지는 꽃은 물결따라 흘러
가니, 물어보자 아름다운 처녀들아, 어찌 그리 수심이 가득한고.
아름다운 처녀들이 수심이 가득한 이유가 무엇이겠어? 자기가 원하는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그런 거지"

"도련님이 어떻게 그런 일들까지 다 아시나요? 한나절 사이에 어른이
되신것 같아요"

"다 경환 선녀 덕분이지. 십년이 넘도록 책을 읽었지만 책에서는
도저히 배울 수 없었던 것들을 경환 선녀가 알기쉽게 가르쳐주었지.
그것도 습인이 네가 말한대로 한나절 사이에 말이다"

"어떤 것들을 가르쳐 주었는데요?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습인이 시녀의 신분이라는 것도 잠시 잊은듯 보옥에게로 바투 다가
앉으며 두 눈망울을 굴렸다.

보옥은 슬그머니 손을 뻗어 습인의 포동포동한 손을 잡았다.

습인은 보옥의 손을 뿌리칠 수도 없고 하여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내가 경환 선녀에게 말했지. 나는 여기가 어딘지 도무지 모르겠으니
길안내를 좀 해달라고 그랬지. 그러자 경환 선녀가 흔쾌히 내 부탁을
들어주는 거야. 그리고 자기 처소가 여기서 그리 멀지 않다면서 선녀
들이 만든 선명차와 손수 빚은 향기로운 술을 대접해주겠으니 그리로
가자고 하는 거야. 거기 가면 춤도 잘 추고 노래도 잘 부르는 무희들이
이번에 새로 지은 홍루몽선곡 열두곡도 들려줄 거라고 하더군. 나는
그저 좋아라하고 따라갔지. 그동안 나를 인도하던 진씨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더군"

(한국경제신문 1995년 3월 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