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노나라의 재상 공의휴는 자기집채마밭에서 기른 아욱을 먹어보고
맛이 좋은 것을 알게되자 그것을 모두 뽑아 버렸다.

또 자기집에서 짠 베가 아름다운 것을 보고는 그것을 짜는 가부를 내보내고
베틀을 불살랐다.

그 이유가 재미있다.

자신의 이익과 관계되는 것들을 물리쳐 행여 백성과 이익을 다투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공의휴와는 반대로 진나라의 재상 왕술은 집에 품질좋은 오얏나무가 있어
열매를 따다 팔았는데 다른 사람이 그 씨를 심을까 염려해 상아로 송곳을
만들어 씨에 구멍을 뚫어서 팔았다.

이익을 독차지 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왕조에서는 중국 고사에 나오는 이 두사람의 사례가 높은 관직에 있던
공직자들의 청렴도를 재는 척도가 됐다.

공직자가 공을 먼저 실행하고 사를 뒤로하여 재산을 경영하지 않는다면
오랫동안 높은 지위를 누렸다고 해도 단연코 부유해질 이유가 없다는 논리가
상식처럼 통했던 시대의 가치관을 반영해준다.

조선조에서는 30여년에 걸쳐 다섯 임금을 섬기면서 재상만도 18년을 계속
하며 85세까지 장수한 정창손(1402~1487)처럼 죽을때 변변한 집한채도
없었던 공의휴같은 청백리도 많았다.

그러나 정인직(1396~1478)같이 82세까지 장수하며 공을 세웠으면서도 이재
에 밝아 부는 이루었으나 이미 생전에 명예를 잃어버린 인물이 그보다 더
많다.

정인지는 검소하게 지내면서도 이재에 남달리 뛰어나 당대에 부호로 이름
났다.

요즘식으로 말하면 부동산투자에 귀재였던지 이웃사람들의 집과 땅까지
닥치는대로 사들여 지탄의 대상이 됐고 포를 사고 팔아 그의 집은 매일
문전성시를 이뤘다.

딸이나 아들을 결혼시킬때면 은으로 항아리를 만들어 주면서도 임금에게는
"조석의 공급이 빚지는데 이르지 않을분"이라고 둘러대 비난을 면치 못했다.

그가 80세대 나라에 원로3인을 추대하는 물망에 정찬손과 함께 올랐으나
재산에 대한 탐욕을 탄핵한 홍문관의 반대로 탈락하는 최대의 불명예를
감수할수밖에 없었다.

그때 "비록 재화는 늘렸다고 해도 법을 어기고 백성을 괴롭힌 일은
없었다"는 것이 그의 항변이었던 것도 흥미롭다.

입법 사법 행정부의 고위공직자들의 지난해 재산변동사항이 공개됐다.

그중 1억원이상 재산이 늘어난 사람이 63명이나 되고 부동산 주식이 재산
늘리기에 대표적 수단이었다는 분석이다.

"가멸하면(재산이 많으면) 어질지 못하다"는 옛말처럼 어질지 못하고 시속
의 폐단이나 따르는 왕융같은 공직자들이 아직 많지 않은가 싶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3월 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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